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ututi Oct 28. 2020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통해 예수를 보았다.

나는 대학에 가서 예수를 처음 만났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는 이미 그 이전에 철학교양서를 통해 접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예수를 알고 난 후 동굴의 비유를 다시 들었을 때 난 플라톤이 말하는 지도자가 바로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이가 있다면 아래 칼럼을 읽고 기억을 되살려 보자.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442100025

우리가 현실에서 바라보는 현상이 있고 우리는 그 현상의 본질은 꿰뚫지 못한 체 그 현상 자체가 본질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예수는 율법이란 허를 파하고 그 율법을 행함에 있는 본질을 파악해서 주께 나아가라 하셨다.  예수가 성경이 말하는 신의 아들이라면 그런 허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에 보내 우리를 일깨우자 한 것일 테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먼저 그 진실을 깨닫고 본인 혼자만 진리를 바라보고 자유를 누린 것이 아니라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 노예들의 묶인 손과 발을 풀어주며 다 함께 동굴 밖의 진정한 빛인 태양(하나님, 이데아)을 바라보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일깨운 이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고 했다. (요한복음 14:6) 예수의 그 깨우침을 받아들이지 않고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현상을 들여다보면 남편이 집안일을 안 도와주면 남편이 내 적이 되고, 자녀가 공부를 안 하고 게임만 하고 있으면 자녀가 내 적이 되고, 시댁에 가서 명절을 지내다 하루 종일 엉덩이도 한번 못 부치고 전만 부치다 오면 시댁 식구들이 내 적이 된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의 본질이 다른 곳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그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라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공격해야 할 대상은 남편, 아이, 시어머니 또는 티브이, 게임, 명절 음식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 우리를 싸우도록 부추기는 사탄이라 말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the lust of the flesh)과 안목의 정욕(the lust of the eyes)과 이생의 자랑(the pride of life)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한 1서 2장 15절 -16절


모든 죄는 이 3가지, 몸의 욕심(the lust of the flesh), 눈의 욕심(the lust of the eyes), 남한테 자랑하고 싶은 마음(the pride of life)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남편이 집안일을 안도와 주니 내가 다 해야 하거나 지저분하고 정리 안된 채로 살아야 한다. 내 몸이 피곤하고 집이 지저분해 불편하니 그 불편을 해소하고 싶은 몸의 욕심이다. 만약 퇴근 후에 팔 걷고 나서 잘 도와주고 주말엔 친구들 만나는 대신 나 대신 집안일도 하고 내가 힘들까 봐 저녁 한 끼 외식을 하고 가족들이랑 나들이나 둘이서 데이트까지 즐기는 사람이라면 SNS에 사진 찍어 자랑도 하고 친구들한테 동서한테 우리 남편은 이렇다 자랑도 할 수 있을 텐데.. 남의 젊은 남편들은 요즘 안 그렇던데 외국 남편들은 안 그렇다던데.. 몸과 눈의 욕심, 자랑 심이다. 아이가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다. 날 엄마로나 대하는지 만만하게 여긴다. 난 인정 안 해주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다. 자랑 심이다. 공부를 잘하고 숙제를 잘했으면 좋겠는데 친구 아들이나 친척 아들은 잘하는 것이 하나씩은 꼭 있던데 우리 아들은 학교 선생님한테서 계속 문자가 온다. 눈의 욕심, 자랑심 때문이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생각하면 공부를 잘해야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 가져서 돈도 잘 벌고 빨리 아파트 마련해서 잘 살 텐데. 그런 아들을 둬서 성인이 돼서 뒷바라지 적게 해도 되고 어깨가 으슥할 수 있을 것 같은 몸과 눈의 욕심, 자랑 심이다. 명절이라 모이면 동서네는 다 차린 상에 절만 하러 오고 제사음식은 내가 다 해야 한다. 몸이 피곤해 천근만근이다. 몸의 욕심이다. 내가 음식하고 수고한 건 당연스레 여기시고 동서네가 드린 선물을 보고 이리 비싼 걸 선물했냐며 칭찬이시다. 자랑 심이다. 차례를 지내고 나서 설거지가 산더미인데 남편은 어른들이랑 앉아 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삼촌네는 부엌으로 찾아와서 동서 보고 뭐 하고 있냐며 이리 와서 같이 이야기 나누자며 동서 손을 끌고 나간다. 결국 설거지도 내 몫이다. 몸과 눈의 욕심이다. 명절 끝나고 친구랑 모여 오랜만에 수다를 떠는데 친구 한 명이 자기네 집은 이제 시댁 어른이 아들도 하나밖에 없는데 무슨 고생시킬 일 있냐며 올해부턴 차례 모시는 대신 가족 여행을 가자고 해서 한적한 곳으로 펜션을 잡아가서 바비큐 해 먹고 놀다 왔다고 한다. 몸과 눈의 욕심, 자랑 심이다. 


법륜스님은 즉문즉설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자신의 문제라 말씀하신다. 하고 싶지 않는데 해야 하고 능력이 안되는데 더 잘하고 싶고 게으르지만 그 결과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래서 노오력 하지 말고 그냥 살라고 하신다. 우리가 그렇게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이런 구속에서 벋어나 부처라는 해탈의 경지를  누리려 정진해 나아가는 게 불자의 삶이자 목표라 말한다. 그리고 나뿐만 깨달음으로 가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모두가 함께 나아가길 바라기에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라 한다.


예수는 본인만 그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그 진리를 가르치셨고 땅 끝까지 모든 모든 민족과 족속에게 전하고 가르치라 하셨다.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신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또 내가 죄인(하나님처럼 완벽한 자가 아님) 임을 깨닫고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의 모습을 향해 그의 삶을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그의 말씀을 따라 전도를 하는 그 목표와 방법은 대승불교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 느껴진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요한복음 3장 16절


예수가 신이던 아니던 그가 이 세상에  공을 쏘아 올린 이유는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가 고통과 죄 속에 있지 않고 자유 속에 있길 원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육체의 고통(묶인 손과 발)과 마음의 고통(두려움)을 접할 때 본질(이데아, 진리, 내 욕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사랑)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자유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자유를 얻은 자는 선택권이 본인에게 있으니 상황의 제한이나 육체의 제한에서 벋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체적 장애가 제한이 되지 않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그러면 요한복음 3장 16절 그 이후의 구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의 영생(죽음에 대한 자유)을 얻는 것이 이해가 갈 것 같다. 철인 왕이 다스리는 플라톤의 국가에는 법이 필요가 없다. 모두가 자유 안에서 거하기에. 오직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뜻대로 살아가면  나는 자유 안에서 거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을 행하며 진정한 성경의 뜻을 따르고자 하며 종교인과 교회의 권력을 무너트리고 오직 예수를 세우고자 한 마르틴 루터의 저 유명한 명언은 예수가 말하는 본질을 알고 행하는 사람들에겐 죽음이 그들을 구속할 수 없고 자유의지만이 영생으로 이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상상해 본다.


고린도전서 13장은 하나님 말씀을 행한다는 것과 그 믿음의 근본이 모두 사랑에 있음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비롯한 구약의 모든 율법을 단 두 가지로 요약하셨다. 네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본질인 사랑이 없고는 기독교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모두 허상일 뿐 아무 의미가 없음을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말해준다. 

https://youtu.be/Tqzde8Z7EWk


기원전 300년대에 살았던 플라톤의 가르침을 예수가 살았던 로마시대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예상된다. 적어도 글을 읽고 쓰는 학자나 기득권자라면 말이다.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이야기하며 그런 이들이 나라를 이끄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예수가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바로 그런 이였기에 로마의 황제와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가 정치적 리더가 될까 걱정했지 않았을까 그 시대 상황을 상상해 본다. 예수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정치적 쿠데타를 일으킬까  겁이 났던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것이 아닐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 1절


나의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 내가 나의 미래에 이루어 지기 원하는 것의 실상인 사랑이요, 지금 내 앞에 보이는 현상들(허상들) 속에 가려져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내 욕심 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증거인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존재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빅뱅이 말하는 알파와 오메가 하나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