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탄생이 정말 이 땅의 축복인 이유: 용서, 인정, 그리고 화합
예수를 믿기 전, 그리고 예수를 믿던 초기 나에게 화두는 과연 성모 마리아는 정말 동정녀 마리아일까? 정말 성령으로 잉태해서 예수가 태어났을까 하는 원초적인 질문이었다. 남녀 간 성관계를 통해 태어나는 사람들에겐 모두 원죄가 있지만 성모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여 태어났기에 예수는 원죄가 없다. 그것이 예수가 진정한 신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말해준다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낳고 키워가며 남편과 사이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내 마음에 딱 들고 즐거울 때 보단 좀 부족한 것 같지만 그럭저럭 하루를 보내며 살아가는 삶이 익숙해질쯤 예수의 탄생 스토리에서 성모 마리아보다 아빠 요셉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은혜가 배가 된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성모 마리아가 정말 믿음이 강하고 정절을 잘 지켜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였더라도 별 상관이 없다. 성경도 마리아가 아닌 요셉의 혈통을 읊어 주는 걸 보면 요셉에겐 특별함이 있다. 그래서 난 아빠 요셉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약혼을 한 여인이 배가 불렀다는 소식이 들린다. 성폭행을 당했는지 아니면 정말 연분이 난 남정네가 있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내가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바보 소리를 들으며 내 명예를 내려놓지 않으면 이 여인은 가족에게서도 버림받고 돌에 쳐 맞아 죽을게 뻔하다. 가엾은 여인. 아무 죄도 없이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뱃속의 어린 영혼. 내가 아니면 이 둘을 보호해 주고 구해 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안아주기로 했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리아가 죄인이 아니라고 그 뱃속의 아이도 죄가 없다고 적극적으로 옹호해 주기로 했다.
용서
성폭행을 당했던 아니었던 그때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선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용서가 내려졌다.
살다 보면 내 잘못이 아닌데 막다른 길에 다 달아 있을 때가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지도 잘 모르겠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헤맬 때가 있다. 상황이 나를 잡아먹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그냥 '괜찮아'란 말을 듣고 싶어 진다.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에게 그런 이였다.
네가 누구였냐, 무슨 일을 했냐는 중요하지 않아. 그게 네 잘못이던 아니던 그런 건 나에겐 아무 상관이 없어. 네가 지금 내게 누구인가가 더 중요해. 이젠 괜찮아. 여기까지 오느라 참 힘들었지.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참 잘한 거야. 이젠 내가 손을 잡아줄게. 힘들어도 조금 더 힘을 내서 같이 가 보자. 내가 지켜줄게.
요셉이 마리아에게 건넨 그 말은, 힘 없이 쓰러져 있을 때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 준 그 힘은 하나님이 나에게 힘들 때 옆에서 속삭여준 그 한마디였고 이끌음이었다.
인정
배가 불러 막달이 된 마리아에게 요셉은 왜 미리미리 출산 예정일을 계산하지 않았는지 산후 준비물을 챙겨놓지 않았는지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나귀 위에 마리아를 태우고 자신은 터벅터벅 걸어서 함께 길을 걸어 가 주는 것뿐.
미리미리 좋은 마차를 준비하지 못해서 미안해. 느리지만 천천히 이렇게 함께 가 보자. 앞에 무슨 일이 닥칠진 잘 모르지만 모든 게 계획처럼 되진 않지만 그래도 내가 곁에 함께 있어줄게.
남들보다 앞서가는 평안한 삶을 살지 못하는 나에게 건네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의 믿음이 부족했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하셨다.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닌데도 늘 시간에 쫓기며 하루 계획을 다 지키지도 못하고 12월의 끝자락에서 돌아보면 매년 신년 계획의 반도 지키지 못하는 의지력 약하고 계획성 없는 나에게 느리게 가더라도 하루하루 살다 보면 언젠간 도착할 거라고 위안을 주셨다.
산통은 시작됐는데 묵을 방이 없어 마구간에 자리를 텄을 때 요셉은 그 마구간 똥냄새와 산통, 젖몸살을 함께 겪었다. 소, 돼지, 닭.... 그런 짐승 같은 야만이 펼쳐지는 세상에서 그들의 똥냄새가 진동하는 세상에서 산통으로 울부짖는 여인에게 괜찮다고 손을 잡아주고 힘을 내서 한번 더 힘껏 고통을 밀어내 보자고 소리쳐 주었다. 고통의 주기가 짧아지고 그 크기가 커질수록 새 생명을 마주하는 희망의 시기가 가까워진다고 독려해 줬다. 모든 게 처음이라 두렵고 낯선 여인에게 자신의 두려움은 뒤로 숨긴 체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다. 깨끗한 짚을 찾아와 깔아주고, 물을 길어와 끓여 땀과 양수와 피로 젓은 두 몸뚱이를 닦아주고 감싸주었다.
3시간마다 한번씩 깨서 우는 아이를 들어 안아 엄마 품에 안겨주며 너는 죄가 없는 아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불러주었다. 젖몸살로 땡땡하게 돌덩이가 된 아픈 가슴을 문질러 마사지 해 풀어주며 여기서 생명의 젓이 나온다고 그걸 먹고 우리의 미래가 큰다고 말해줬다. 예수의 똥 싼 기저귀를 12월 차디 찬 냇물에 빨아주며 우리 아들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싸네 하며 자랑스러워해 줬다.
아빠 요셉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나를, 내가 가장 연약할 때 나를 그 존재 자체가 소중한 거라고, 나이기 때문에 소중한 거라고 인정해줬다.
화합
예수가 어릴 적 부모 손을 놓치고 없어지자 아빠 요셉은 엄마 마리아와 예수를 찾아 온 동네를 뛰어다녔다. 하나님의 아이기에 하나님이 지켜주시겠지. 특별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니 알아서 잘할 거야 하고 넉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근심하며 사흘 밤낮을 수소문해서 내 아들 어린 예수를 찾아다녔다. 자신을 아빠 요셉이 얼마나 애지중지 키운 줄도 모르는 철없는 어린 예수가 당신이 내 진짜 아빠가 아닌 걸 안다고 말대꾸를 하는 그 와중에도 아빠 요셉은 어린 예수를 다시 찾은 것에 기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랄수록 아빠 예수는 사랑을 더 많이 부어주며 자신의 큰 아들로 키웠다. 자신의 친자식들에게 맏형으로 키웠다. 나중에 크면 예수 또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도록 자신이 아는 가장 큰 재주인 목수일을 아들에게 가르쳐 줬다. 산을 타고 도끼질을 하게 하여 근육을 단련시켰고, 톱질과 망치질, 대패질을 알려주어 새로운 것을 만들고, 고장 난 것을 고칠 줄 아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가 되도록 만들었다. 넌 특별한 사람이니 알아서 크겠지가 아니라 어린양처럼 자신의 태두리 안에 넣어 살피고 알뜰살뜰 보듬으면서 키웠다.
훗날 한 마리의 길 잃은 어린양의 비유를 들던 예수는 그날 길을 잃고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예배당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자신에게 애타는 눈빛으로 헐래 벌떡 뛰어와 뜨거운 가슴으로 꼭 껴안아 준 아빠 요셉을 생각했을 지도.
내가 별로 특별하지 않기에 별로 특별하지 않은 예수가 별로 특별하지 않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의 외아들이 아닌 아빠 요셉의 맞아들로 자란 그 이야기에 더 큰 감동을 받고 더 큰 은혜를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 너희도 너의 이웃에게 아빠 요셉이 되어주라 이야기하신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 세상엔 진짜 산타가 없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산타클로스의 이야기를 믿지 않더라도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산타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