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이 한 마디가 입 밖으로 나가기란 참 무겁다.
내가 악을 바락바락 쓰고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 한 마디가 그렇게 하기 힘드냐며 제발 미안하다고 말해달라고 했을 때 엄마는 심플하고 담백하게 '미안해' 하고 말하는 대신 '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치자!'라는 대답으로 사과를 대신했고 그런 진정성 없는 사과는 우리 사이 감정의 골을 더 깊게 만들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 보면 우리 엄마가 아주 나쁜 엄마는 아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부엌에선 내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만들고 계셨고, 내가 잘 되길 원하셨다. 다만 우리 엄만 공감능력이 다소 떨어지셨고, 자존심이 아주 셌으며, 요즘 엄마들처럼 정서적 지원 보단 물질적 지원을 우선시했고, 성취와 결과물을 과정과 가치보다 우선시하는 전형적인 기성세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 교통사고로 인해 뇌수술을 한 경력이 있다. 그래서 가족들은 엄마의 히스테리를 뇌수술 후유증이다 생각하며 이해하고 넘어가기도 했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받아주느라 몸에 사리가 쌓였다. 물론 술 담배 때문에 심장병이 온 것도 있겠지만 가족들 사이의 농담으로 8할은 엄마의 잔소리 때문에 스트레스로 생긴 거라 말한다(믿는다.)
참 웃긴 게 그렇게 싫어하는 엄마의 모습이 내가 어른이 되면서 나에게서 점점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큰 욕은 남편이 나에게 건네는 '너 장모님 닮았어'이다. 보통 남편이 네게 그 말을 할 땐 내가 발끈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장난으로 던지지만 가끔 정말 정색을 하며 '너 장모님처럼 왜 그래?' 하고 물을 때면 나도 깜짝 놀라 다시 나 자신의 행동과 말투를 돌아보게 된다.
미국 가정에서 십 대 후반을 보낸 내가 받은 가장 큰 문화 충격은 가족 안에서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는 이 세 단어가 밥 먹어니? 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자주 주고받는 대화라는 것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사회인 가족 안에서 우리는 가장 기본을 못 배우고 자란 것이다.
한국에서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이 왔다. 우리가 부부가 부탁한 책 30권 사이사이에 각종 과자와 라면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노는 언니에서 봤던 노래방 마이크도 2개나 있고 신년 카드와 연하우표도 동봉되어 있었다. 우리 시댁 식구들은 이렇게 따뜻하고 정이 많다. 부엌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는 아들이 유혹을 못 이기고 첫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칸초를 한 봉지 뜯었다. 좋은 것은 자고로 나눠 먹어야 하는 법. 엄마가 뭐라 할까 눈치를 보더니 싱긋 눈웃음을 던지더니 오동통한 손으로 하나를 집어 엄마 입에 쏘옥 넣어준다. 나도 봉지에서 하나를 꺼내 들고 방에서 수업하는 딸 입에도 넣어주려 이쁜 딸 이름을 부르며 방 문을 열었다. 헌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잠시 정적이 흐르며 세상이 1-2초간 멈추더니 딸 입에서 괴성이 나오며 오열을 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소리를 지르며 우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무슨 상활인지 이해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진정을 시키려니 나도 소리를 질러야 했다.
이유인즉슨, 사과를 깎아 소금과 베이킹 소다에 넣어 미라를 만드는 사회 역사 수업의 활동이 있는데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라 결과물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비디오를 찍고 있는 중이었단다. 앞에 매일매일 첫날부터 활동사항을 설명하는 비디오를 찍어 왔었고 오늘은 그 마지막 날이라 오늘 오후까지 비디오를 제출해야 하는 데 그 비디오를 찍은 중간에 내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딸의 이름을 외친 것이다. 이 사이트는 편집 기능이 없단다. 사과 미라를 만들려면 3일이 꼬박 걸리는데 오후 5시까지 비디오를 만들어 내야 되는데 전부 엄마 탓이란다. All A 완벽주의자 딸에겐 세상이 무너질 노릇이다.
정말 편집 기능이 없니? 몇 번을 되물어보고 다시 상황을 파악하고 선생님이 사용해서 올리라는 사이트와 비디오를 찍는 소프트웨어를 잘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당연히 편집 기능이 있다. 그러는 동안 1교시 수학선생님이 반대쪽 화면에선 떠들고 있고 딸은 아직 말라비틀어진 사과를 들고 책상 위엔 베이킹소다와 소금을 질질 흘리며 꺾꺽 거리며 제대로 컨트롤되지 않는 호흡을 해 보려고 노력 중이다. 일단 애부터 안정을 시키려 등을 쓰다듬어주는데 애는 내 손이 닿기가 무섭게 경기하듯 화를 낸다. 나도 미안하단 말이 쏙 들어가고 '그것 봐 엄마 말이 맞잖아. 편집 기능 없는 비디오 녹화 소프트웨어가 어디 있니? 그리고 너 수학 시간에 사회 숙제하면 되니? 일단 네가 잘못한 거잖아. 얼른 그거 치우고 수학 수업이나 들어' 하고 소리를 지르게 된다.
진정이 다 된 건가? 딸아이 방이 조용해지고 점심시간이 됐다.
비디오를 다 찍어 올린 딸이 아까 있었던 일은 잊어버린 듯 미라 사과가 정말 귀엽지 않냐며 애교를 부리며 나온다. 다시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이쁘긴 한데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내가 내 딸에게 그리고 내 딸이 내 손녀 손자에게 또다시 반복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다.
"꾸미야, 아까 엄마가 노크 안 하고 그냥 문 벌컥 열고 들어가서 미안했어. 다음엔 안 그럴게. 근데 너도 엄마한테 해야 될 말 없어?"
딸아이가 꾸물거린다.
기다린다...
장난기 어린 눈으로 "I'm not sorry", " You are sorry", "Sorry?" 등의 말을 내 뱉는다.
다시 아이를 바라보고 "제대로 이야기해야지." 하고 타이른다.
내 눈을 피한다.
"엄마 바라보고 말해야지." 하고 다시 기다려 준다. 그렇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해 숨었듯 이건 모든 우리의 모습이다.
웃음기는 사라지고 다시 아이가 울먹이기 시작한다.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아니 아이랑 기싸움을 하는 동안 국은 펄펄 끓어오르고 계란 프라이는 타는 냄새가 난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다시 아이를 바라보고 말을 건네본다.
'미안하단 말이 나오는 게 힘들지? 엄마도 미안하단 말을 하는 게 힘들어. 그래도 하는 거야. 그렇게 연습을 해야 밖에서도 네가 실수를 하고 잘못했을 때 진정한 사과를 할 수 있고 상대방과 관계를 한 번의 실수로 깨뜨리지 않게 되는 거야. '
닭똥 같은 눈물이 두 눈을 가득 차오르다 턱 밑으로 주르륵 흐른 후에야 모기만 한 소리로 내뱉는다.
"I'm sorry."
"엄마는 잘 안 들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말해 보려 하는데 거친 숨소리에 섞여 아직도 잘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몇 번의 노력 끝에 제대로 된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천금같이 무거운 한마디가 아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I'm sorry, mom."
그 말이 땅에 떨어지면 깨질까 얼른 아이를 꼭 끌어안아준다.
"엄마가 소리 지른 거 정말 정말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