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는 어린아이들 놀기 좋은 작은 놀이터와 물놀이장이 곳곳에 있다. 아주 현대적인 도시인데 녹음과 아이들 놀거리가 어우러져 있는 곳. 우리는 돌아다닐 때 가방 속에 하하의 수영복 팬티, 스포츠 타월, 작은 페트병 하나를 늘 넣고 다녔다. 예정에 없었더라도 물놀이터가 보이면 한 시간 놀며 더위를 시켰고 젖은 수영복은 배낭에 걸고 좀 걸으면 금방 말랐다. 그리고 식수대가 많이 보여 생수를 사지 않고 잘 활용했다.
어떤 레스토랑에 갔을 때의 일이다. 쇼핑몰 안이었는데, 아주 넓은 공간에 아이들용 보드게임과 작은 풀장까지 갖춘 재밌는 공간이었다. 하하를 마음껏 놀게 하면서 나는 밥을 먹을 수 있는 곳. 우리나라로 치면 키즈카페인데, 어린이 놀이터에 보호자를 위한 약간의 음식이 갖춰진 곳이 우리나라 키즈카페라면, 여기는 레스토랑인데 아이들 놀거리를 잘 갖춰놓은 곳이었다. 음식맛도 좋고 메뉴도 많았다.
아이들이 많으니 하하는 너무 신이 났다. 12월 생이라 생후 15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다니며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는데, 친구들을 못 만나고 엄마랑만 보름째 다니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또래가 그리웠으리라. 또래는 아니고 대부분 형 누나들이었는데, 하하는 눈높이보다 높은 보드게임판에 붙어 끙끙거리고 있었다. 안되겠는지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저쪽에 놓은 의자를 낑낑대며 안고 와 밟고 올라서는 것이 아닌가. 좀 놀라웠다. 여행의 경험이 저 아이에게 만들어준 지혜가 이런 게 아닐까.
16일 차, 센토사 섬까지 돌아보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국가인 인도네시아로 이동하는 날.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 인도네시아로 가면 편했겠지만 비행기삯이 두배 이상 비쌌기 때문에, 우리는 싱가포르에서 다시 말레이시아로 이동해서 인도네시아 룸복으로 가기로 했다.
룸복은 발리의 동쪽으로 나란히 있는 섬으로 ‘때 묻지 않은 발리’라고 할 만큼 덜 관광지화 되어있어 원주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 하여 발리에 가기전 꼭 들러보고 싶었다. 나란히 있지만 발리가 힌두교의 섬이라면 롬복은 대다수가 무슬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롬복에서 이틀을 보내고 배를 타고 길리 트라왕안이라는 섬으로 들어가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롬복행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버스도 아니고 전철도 아니고 비행기를 놓치다니. 이런 일이 진짜 일어나다니. 싱가포르에서 조호르바루로 기차 이동, 조호르바루에서 쿠알라룸푸르까지 비행기 이동, 그리고 쿠알라룸푸르에서 롬복까지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는 여정이었다. 아침 6시 30분에 싱가포르 숙소를 나와서 택시, 버스, 기차, 택시, 비행기, 그리고 다시 비행기로 이어지는 여정이었으니, 오차 없이 가기 위해 얼마나 또 이 경로를 되새김질하고 되새김질하며 전날 잠이 들었을까.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긴장이 너무 풀려버렸나 보다. 롬복행 비행기 탑승까지 2시간의 텀이 있었고, 무료 와이파이를 쓸 수 있는 라운지에서 나는 글을 쓰고 하하는 만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회사 비행 편을 이용하면서 연착이 없었던 적이 없었어서 너무 늦장을 부린 탓이었다. 길 위의 삶이 보름을 넘어가고 이미 네 번의 국가 이동을 했고 보니, 시간을 최대한 쪼개 쓰겠다는 마음이 자신감을 넘어 태만으로 이어진 것이다. 너무 늦었다 싶어 하하를 안고 뛰었는데 이미 문은 닫혀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있을까.
좌석이 남아있는 롬복행 가장 빠른 비행기는 이틀 뒤에나 있다고 했다. 이미 거쳐간 말레이시아에서 이틀을 더 보내고 싶지는 않았고, 내가 미리 끊어둔 롬복행 티켓은 조호르바루에서 쿠알라룸프르 경유하는 두 비행 편을 합쳐도 2인 14만 원이었는데 이틀뒤 좌석은 배로 비쌌다. 눈물을 머금고 현장에서 제일 빠른 발리행 티켓을 끊어 이동했다. 발리에서 길리 섬으로 들어가는 걸로 하고, 롬복은 포기해야 했다.
북적대는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애를 안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수화물로 부쳤던 짐을 물어물어 찾고, 다시 표를 끊고, 다시 짐을 부치고, 영문을 알길 없는 아이는 지쳐서 칭얼거리기 시작하고. 이번에는 나도 너무 당황을 했고 아이에게 상황을 이해시켜 줄 시간이 없었다. 갑자기 행선지가 바뀌니 숙소도 없었다.
에어비앤비는 당일 예약이 안되기 때문에 별 네 개 이상 중 공항에서 가장 가깝고 가장 싼 숙소를 검색해 호스트와 메시지로 주고받아 구두예약을 했다. 에어비앤비는 호스트와 직거래 방지를 위해 계약 전 메시지에 링크를 걸거나 주소를 보내는 등을 막아놓았기 때문에, 주소도 없이 약도사진 한 장을 보고 공항에서 숙소를 찾아가야 했다.
발리에 도착한 시간이 밤 11시. 이 시간에 아이를 걷게 해서 숙소로 가는 건 불가능했다. 롬복으로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발리 응우라라이 공항과 그 주변 택시에 대한 정보를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럴 겨를이 미처 없었다. 엄마가 짐이 너무 많으니 조금만 걸으면 안 될까 사정했으나, 단호하게 “노우!”. “엄마가 너무 힘들어.” 하고 말해도 내가 괜찮은 건지 지가 괜찮은 건지 “괜찮아”를 반복할 뿐이었다. 배낭이 13kg, 아이가 15kg, 앞에 멘 작은 배낭까지 합 30kg 이상을 짊어지고 걸은 셈이다. 내 몸무게의 2/3 무게.
그 와중에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쥐고 약도를 보며 깜깜한 길을 걷고 걸어, 원래는 공항 빠져나와 걸어서 5분 거리인 숙소 언저리에 자정이 넘어 도착했을 때, 저 앞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보였다. 헤맬까 봐 대문 앞에 나와있던 에어비앤비 숙소 호스트.
내 꼴을 보더니 달려와 미소를 지으며 두 팔 내밀어 아이를 안아간다. 엉망으로 꼬인 하루, 남은 여행을 좋은 컨디션으로 할 수 있을까 싶었던 기분을 다 날려버린 너무도 다정하고 친절한 발리의 첫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