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일간의 배낭여행 12. 룩소르
아침 7시 미리 약속해 둔 택시기사가 숙소 앞으로 왔다. 빠르게 뜨거워질 것이므로 서둘러 출발하고 오후에는 수영장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사전에 요금을 협의하고 호출했어도 나중에 더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출발 전에 비용에 대해 다시 확인했다. 정오까지 10달러로 협의하고 시간이 늘어나면 추가로 더 드리기로 하고 출발했다. 왕가의 계곡과 핫셉수트 장제전을 기본으로 하고 시간을 보고 왕비의 무덤은 판단하기로 했다.
왕가의 계곡으로 이동하는 길에 먼저 멤논의 거상 앞에 잠시 내려 주었다. 입장료가 따로 있지는 않고, 그냥 본다면 공터에 큰 조각 두 개가 덩그러니 있는 느낌이지만 자그마치 3400년 전에 만들어진 파라오 아멘호테프의 조각상이다. 아멘호테프 3세는 이곳에 자신의 거대 조각상 2개와 함께 장례신전을 지었는데, 석재를 재이용하느라 부수어서 조각상만 남았다고 하고, 주변에 다른 조각상 흔적들이 보인다. 파라오와의 첫 대면이다.
긴 시간 지체하지 않고 왕가의 계곡으로 이동했다. 보통 이집트 여행에서 많이 만드는 룩소르 패스를 우리는 만들지 않았다. 네페르테리 무덤 등 추가요금이 붙는 유적지를 보려면 일반 패스가 아니라 프리미엄 럭셔리 패스를 구매해야 하는데, 성인 220유로 학생 120유로로 가격부담이 너무 컸다. 카이로 패스와 같이 구매한다면 두 번째 구매하는 패스는 50%로 할인을 받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카이로가 아니라 룩소르를 먼저 왔기 때문에 가격이 더 비싼 룩소르에서 50% 반값할인을 받을 수가 없어서 패스는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파라오란 원래 고대 이집트어로 '큰 집' 다시 말해 왕궁을 뜻한다. 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된 것은 제19왕조쯤이라고 한다. 왕이라고 하면 현대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이겠지만, 고대 이집트에서는 '살아있는 신'의 위상이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와 기원전 3000여 년 전부터 이어지는 역사를 본다면 고대 이집트 유적이 참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번 지중해 여행 제1의 목적이 유적 관람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서 아쉽지만 포기. 다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체험하고 꼭 보고 싶은 것들만 따로 돈 내고 보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가이드를 고용 안 하는 대신 책 한 권을 들고 갔다. <고대 이집트 해부도감>. 일러스트와 함께 쉽게 주요 유적에 대한 설명이 있는 책이다. 왕가의 계곡 입장료는 성인 기준 400 EGP인데 세 곳의 무덤을 들어가 볼 수 있고, 세티 1세나 투탕카멘 무덤 등은 또 거기 포함이 안되고 별도 입장료를 내야 한다. 우선 기본 입장표만 내고 들어갔다. 책을 보면서 가보고 싶어 표시해 놓은 무덤이 몇 곳 있었는데, 입장권으로 먼저 그곳들을 보고 별도 입장권을 판단하려고 했다.
왕가의 계곡은 신왕국 시대 거의 모든 왕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날은 무섭게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작렬하는 태양 아래 사막에서 유적을 발굴하는 탐험가처럼 드넓은 모래빛 유적지를 걷고 있는 자체로 비현실적이고 좋았다. 그런데... 무덤들을 본격적으로 돌면서 든 생각은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아 왜 이렇게 밖에... 하는 느낌이었다. 추가 입장료를 받는 곳 외에는 가보려고 했던 몇 곳은 폐쇄되어 있었다. 결국 400 EGP 입장료는 의미가 크게 없었던 것. 그중 가장 웅장한 무덤은 세티 1세의 것이다. 세티 1세 무덤만 보는데 따로 1400 EGP이고 심지어 여기는 학생할인도 없었다. 왕가의 계곡 내 모든 무덤을 자유롭게 본다면 둘이 20만 원 가까운 돈을 내야 하는 셈.
더 실망한 것은 그리스 인들은 유적지 안에서 돌 하나도 들고 나오는 걸 막던데, 무덤 안 입구에서 관리인들이 누워 자거나, 식사를 하거나, 심지어 내부 제한구역을 팁 받고 들여보내주는 등의 모습이었다. 관리인 한 명은 우리가 나오는데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폰을 거의 뺏어가다시피 했고 꽤 여러 컷을 찍어주었다. 당연히 팁을 바라는 것인 줄 알았지만,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이 귀하니 기꺼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폰을 내밀며 동시에 내미는 다른 한 손에 팁을 쥐어주기 전에 사진을 확인했더니, 맙소사, 얼굴이나 몸통이 다 잘리고 제대로 찍힌 사진이 단 한 개도 없었다. 이 유구한 역사의 현장이 이런 정도로 관리될 유적일까 하는 생각. 그리스에서는 유적이 그들의 자부심으로 여겨졌는데, 이집트에서 유적은 지금 경기가 어려운 이 나라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입장권으로 관람이 가능한 무덤만을 보기로 했다. 나머지는 현장 분위기와 다른 여행자들의 여행기 사진으로 만족하는 것으로. 하하는 미리 읽고 간 지식으로 벽에 그려진 풍뎅이 모양 스카라브에 대해 내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집트에서는 스카라베를 중요하게 여겼어요. 쇠똥구리가 똥을 굴리는 것을 태양의 움직임으로 본 거예요."
<이집트에서 보물찾기>에서 읽었나 보다. 하하가 책에서 활자로 읽은 역사를 현장에서 보고 연결 짓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유적지 관람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싶었다. 그리고 기특하여 룩소르를 떠나면서 스카라브 모양의 은 펜던트를 선물로 사주었다.
왕가의 계곡에서 핫셉수트 장제전을 보고 네페르타리 무덤으로 갔다. 핫셉수트는 제18왕조가 번영하도록 기초를 쌓은 여왕이다. 입구에 턱수염을 붙인 남성적인 모습으로 표현된 여왕의 스핑크스 조각상이 인상적인데, 파라오는 반드시 남성이어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네페르타리 무덤은 바로 앞까지 갔으나 입장권이 학생할인도 없이 1인 1600 EGP인 것을 보고 그냥 발길을 돌렸다. 독보적으로 화려하고 사람들의 숨결로부터 보존하기 위해 관람시간을 단 10분으로 제한하는 곳이다. 사실은 학생할인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들어가 볼 요량으로 간 것인데, 그만한 가치가 있고 보존이 중요하니까 가격 책정이나 다른 정책을 이해했지만, 세티 1세와 이곳만 학생 할인을 안 두는 것은 논리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웠다. 다른 여행자들의 블로그 사진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로 했다.
동안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점심식사를 하고 카르나크 신전에서 룩소르신전까지 걸으면서 둘러보며 숙소로 돌아올 생각으로 택시 기사님께 카르나크 신전 근처 맛집 추천을 부탁드렸다. 식당 앞 도착 13시 30분. 원래 10달러를 이야기하고 출발했으나 시간이 오버됐고 팁도 조금 보태서 17달러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