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떤 사람은 양털을, 어떤 사람은 돼지 털을 깎을까

따라가는 순간, 선택은 멈춘다

by 미적호기심

요즘은 이유보다 속도가 먼저다. 누군가 무엇을 시작했다고 하면, 왜 하는지는 나중 문제로 밀려난다. 유행의 흐름에서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왜’라는 질문을 집어삼킨다. 이처럼 판단보다 시선이 먼저 움직이는 모습은 과연 지금에만 존재하는 풍경일까.


남이 하는 대로 휩쓸려 움직이는 인간의 군상은 이미 16세기 화가 피터 브뤼겔의「네덜란드 속담」 속에서도 선명하게 발견된다.

돼지털깍는사람.jpeg 〈네덜란드 속담〉(Netherlandish Proverbs, 1559) 중 '돼지털 깎는 사람' 부분 장면


그림 속에서 기이한 장면이 시선을 붙든다. 한 사람은 양털을 깎고 있고, 그 옆에서는 또 다른 사람이 돼지 털을 깎고 있다. 깎아낼 부드러운 양모, 얻을 실익도 없는 돼지를 붙잡은 채 그는 누구보다 진지하다. 손놀림은 능숙하고 표정은 엄숙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치열한 노동에는 애초에 남는 것이 없다.


돼지는 양이 아니다. 털을 깎아도 얻을 것이 없다는 본질적인 사실만 제외하면 모든 과정은 그럴듯하다. 남이 하기에 나도 한다는 논리는 이처럼 정교한 헛수고를 만들어낸다.


우리에게도 이 장면과 닮은 속담이 있다.

"남이 서울 간다니 저도 간단다"

남이 한다는 이유만으로 앞뒤를 재지 않고 길을 따라나서는 태도를 꼬집는 말이다.


이 속담이 날카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역시 이미 수없이 그렇게 움직여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보다는 남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안도감이 앞선다. 결과가 무(無)에 수렴한다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


회의실에서도, 시장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한 장면은 반복된다. 누군가가 이미 성공한 방식이라면 그 방식이 나에게도 맞는지 묻기 전에 가위부터 집어 든다. 판단은 유보되고, 질문은 소거된다.


문제는 남을 따라 했다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다. 내가 따라가고 있는 대상이 양인지, 돼지인지 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움직였다는 사실에 있다.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다는 상태, 그 질문의 부재가 문제다.


양털을 깎는 사람과 돼지 털을 깎는 사람의 차이는 노력의 양이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충분히 성실하다. 다만 그 노력이 담기는 그릇, 곧 '선택의 이유'가 한쪽에는 있고 다른 한쪽에는 결어 되어 있을 뿐이다.


선택은 타인의 속도가 아니라 내가 납득한 이유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성공한 누군가의 겉모습, 가위를 쥔 손동작만 따라가는 순간 선택은 '주체적 행동'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수동적 반응'으로 전락한다.


이유를 모른 채 따라가는 순간 우리는 판단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맡긴다. 취업 시장이나 커리어의 기로에서도 우리는 종종 돼지를 붙잡는다. 누군가의 합격 수기를 그대로 베끼고, 유행하는 직무를 좇아 급하게 방향을 튼다. 그 선택이 나에게 맞는지 묻기 전에, “지금은 다 이렇게 한다”는 말로 스스로를 설득한다.


문제는 실패가 아니다. 그 선택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순간이다. 그때 우리는 말한다. “나도 남들처럼 했을 뿐인데.” 그러나 그 말속에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비겁한 고백이 숨어 있다. 판단을 넘긴 만큼 결과에 대한 책임도 흐려진다. “남들도 다 그랬으니까”라는 위안 뒤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돼지 털을 깎는 사내의 모습에서 웃음이 오래가지 않는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 역시 삶의 어느 길목에서 비슷한 손놀림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속도와 남의 도구에 함몰되다 보면, 정작 내가 붙잡고 있는 대상이 돼지라는 사실을 영영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그림은 묻는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효율적인가가 아니라, 그 일을 선택한 주체는 누구인가를.

줏대 없는 모방의 끝에 남는 것은 성과가 아니라, 텅 빈 공허뿐이다.


브뢰겔 1번.jpg 〈네덜란드 속담〉(Netherlandish Proverbs), 1559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대표작


작가의 이전글버티는 것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