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를 잃은 목표는 왜 늘 집착이 되는가
우리는 목표가 큰 사람을 쉽게 긍정한다. 야망이 있다는 말은 언제나 칭찬처럼 들리고, ‘꿈을 크게 가지라’는 조언은 시대를 막론한 미덕으로 반복되어 왔다.
하지만 목표가 크다는 사실과, 그 목표가 자기 자리에 맞느냐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점이다. 드높은 높이를 바라보는 동안에도, 내 발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는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16세기 화가 피터 브뤼겔의 「네덜란드 속담」 속 한 장면에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달이 그려진 간판대를 붙잡고, 달을 향해 오줌을 누고 있다. 자세는 위태롭고, 시선은 지나치게 높다.
이 장면은 ‘달에게 오줌을 눈다(Pissen tegen de maan)’라는 네덜란드 속담을 형상화한 것이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목표만을 좇다가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상태, 불가능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가리킨다.
그의 행동은 시작과 동시에 결과가 정해져 있다. 아무리 온몸에 힘을 실어도, 오줌은 달에 닿지 않는다. 헛된 노력으로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흘려보내는 동안, 그는 정작 자신을 돌보고 점검할 기회는 그 과정에서 사라진다.
문제는 그가 이 사실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다. 어쩌면 그는 알고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자기 최면이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남자의 얼굴에는 붕대가 감겨 있다. 이미 다쳤고, 이미 어긋난 상태라는 증거다. 보통이라면 이쯤에서 멈추고 자기 위치를 다시 살펴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시선을 낮추지 않는다. 상처를 돌아보고 수습하기보다, 여전히 닿지 않을 하늘만 올려다본다. 시선이 현실보다 높을수록 발밑의 지반은 더 불안해진다는 사실을 잊은 채로 말이다.
이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지금 이 시대의 관계와 경쟁 속에서 우리는 종종 이 붕대 같은 남자가 된다. 속도를 늦추기보다 더 세게 밀어붙이고, 점검해야 할 시점을 포기나 패배로 오해한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의지 부족으로 해석하고, 잠시 멈추자는 제안을 도태의 징후로 받아들인다. 상처를 감춘 채,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몸을 고정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태도를 경계하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속담이 있다.
“꼴 보고 이름 짓는다”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돌아보지 않은 채 분수를 넘는 행동을 경계하라는 뜻에 가깝다.
여기서 말하는 ‘분수’는 꿈을 접으라는 체념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정직하라는 요구에 가깝다. 지금 나의 자리, 지금 내가 가진 조건, 지금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외면한 목표는 나를 성장시키는 비전이 아니라, 나를 갉아먹는 독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림 속 남자는 높이를 착각했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는 보지 않고, 어디까지 닿고 싶은지만 생각했다. 그 결과는 성취가 아니라 끝내 반복되는 좌절과 덧나는 상처뿐이다.
높은 목표는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 객관화라는 단단한 지반이 없는 목표는 금세 방향을 잃고 집착으로 변질된다. 그 순간부터 목표는 나아갈 길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묶는 밧줄로 변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내가 간절히 바라보고 있는 저 ‘달’은 과연 닿을 수 있는 목표인지, 아니면 오만함이 만들어낸 환영은 아닌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땅을 딛고 서 있는지를.
무모하게 하늘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만이 용기는 아니다. 오히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붕대 속의 상처를 먼저 들여다보며, 정직하게 바닥을 딛고 서는 태도야말로 더 큰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바닥을 단단히 다진 사람만이, 언젠가 저 달에 닿을 수 있는 사다리를 한 칸씩, 조심스럽게 놓아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