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리옹에서의 첫 스튜디오

이사, 공간 그리고 취향

by 애융

햇빛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우울한 기숙사 내 방. 좁은 침대에 누워 리옹 9구 끝자락에 위치했던 나의 첫 번째 스튜디오를 생각했다. 장미 덩굴이 우거진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주 보고 있는 3층짜리 두 개의 건물 중간에 안뜰이 있었다. 주인아저씨의 한쪽 눈을 잃어버린 검은 고양이가 마당을 한켠에 누워있었다. 오른쪽 건물 앞, 낮은 담벼락을 마주한 돌계단을 올라간다. 1층은 주인아저씨의 작업실, 2층은 주인아저씨댁 그리고 3층에 위치했던 나의 공간.


대학원 합격소식을 듣자마자 집을 찾기 시작했다. 안전한 동네, 청결, 위치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 등 따져야 할 조건들이 많지만 분명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긴다. 약속을 잡고 몇 군데 방문해 봤으나 ‘이 집이야!’ 하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교적 멀어 큰 기대 하지 않고 있던 마지막 집을 방문하는 순간, 직선거리로는 학교와 가깝다는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조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첫째, 프랑스에서 외국인이 집을 구하려면 재정적으로 보증해 줄 수 있는 프랑스 사람의 서류가 필요하다. 다행히 주인아저씨는 아시아 학생들에게 관대했고 보증인 여부를 문제 삼지 않았다. 둘째,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였으나 내부는 현대식 스튜디오였다. 방과 부엌이 문으로 분리되어 있고 바닥도 깔끔했다. 욕실에도 큰 창문이 있어 환기도 되고 단을 만들어 한 칸 높이 위치한 샤워부스의 디테일도 좋았다. 수납공간도 충분하고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밝은 부엌인 것도 만족스러웠다. 셋째, 기본적인 가구가 구비되어 있었다. 언제 도착할지 몰라 하루종일 배송을 기다려야 하고 게다가 이사 가야 할 때면 다시 팔아야 하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사실 결정적으로는 방 양 쪽 벽에 있는 크고 긴 창문에 반해버렸다. 햇살이 들어오는 아늑한 방 안에서 침대에 기대어 책을 읽는 내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내 취향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곳을 찾은 것 같았다. 그래. 거리가 뭐가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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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약금을 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비쉬로 돌아왔다. 이사까지는 두 달 정도가 남았었지만 가장 큰 골칫거리인 주거를 해결한 것만으로도 낯선 도시에서의 삶이 기대됐다.


그러나 역시 살아 보기 전까지는 모르나 보다. 완벽해 보이던 이곳의 실체는 첫날 바로 드러났다. 창 밖의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렸다. 소리에 엄청 민감한 내게는 치명적인 단점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래, 이 정도면 참을 수 있어.’ 라며 외부 소음에 익숙해질 때쯤, 겨울이 찾아왔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집을 계약했기에 그때는 몰랐지. 오래된 창틀로 둘러싸인 창문은 그 크기만큼 겨울바람을 집 안으로 들어 보냈다. 창문 바로 밑에 있던 라디에이터는 시린 바람에 밀려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집 안이 너무 추워 책상에 오랜 시간 앉아 있을 수도 없어 이불을 둘둘 말고 전기장판 켜둔 침대 안에서 겨우 공부를 했다. 나를 가장 설레게 했던 큰 창문이 이렇게 배신할 줄이야.


이 스튜디오에서 졸업할 때까지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살고 싶었다. 정확히는 더 이상 이사하고 싶지 않았다. 나름 꼼꼼히 검토했다고 생각했는데도 6월의 햇빛에 눈이 멀었었나 보다. 아주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서 설렜다. 그러나 로망을 위해 다음 겨울까지 버티기에는 너무 추웠다. 봄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고 아쉬움을 남긴 채, 그곳을 떠났다.


우린 어릴 때부터 마음을 붙일 수 있는 ‘내 방’이란 공간을 요구한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며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그 공간에서 매일을 곱씹으며 성장한다. 그만큼 공간이 주는 안정감은 크다. 하지만 스무 살 이후로 줄곧 이동하며 살아서 그런 걸까. 잦아드는 이사에 익숙해지면서 공간에 대한 애착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곧 떠날 곳인데 대충 지내자.’라는 습관이 생겼다. '어차피 사봤자 짐만 늘겠지.' 취향이 담긴 물건들은 짐이 되었다.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엽서들을 벽에 붙여두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자발적이 아닌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고 어느새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줄어드는 짐만큼 나 자신도 점점 잃어가고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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