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주, 졸정원

by 프레이야

2002. 1. 9. 소주-졸정원 / 호구산

소주(부자동네)에서 태어나, 항주(미인이 많다)에서 살고 , 광동(산해진미, 맛의 고장)에서 먹고 , 유주(산수가 좋다)에서 죽어라.

하늘에는 천당이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소주에는 50여 개의 개인 정원이 있고 7층 이상의 고층건물은 금지하고 있다. 높은 건물로 소주의 아름다운 정원을 가리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주의 인구는 160만 명 건물은 흰 벽에 회색 기와로 옛날 색을 고수하고 있다. 인상적인 도시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합려가 성을 쌓고 오자서 장군이 사람들을 동원해 수로를 파서 집집마다 돌다리로 연결했는데 그 수가 526개이다. 마르코 폴로는 이곳을 돌아보고 동방의 베니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처음 간 곳은 한산사. 한산사는 당나라 때 유명해졌다. 과거시험에 3번이나 낙방한 장계가 장안에서 돌아오던 중 그의 배가 풍교와 강춘교 사이에 머물러 있을 때 한산사의 종소리가 들려와 수심에 찬 그에게 시상을 일으켜 시를 읊게 되었다고 한다. 그 시가 '풍교 야박(楓橋夜泊)'으로 한산사에 새겨져 있다. 매년 그믐 저녁 11시 42분 10초에 종을 치기 시작해 108번을 치면 새벽 한 시가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 그 종은 청나라 때 일본인들이 약탈해 갔으며 종을 되돌려 받으려는 불교계의 지속적인 요구에 일본은 종을 하나 만들어 한산사에 보냈다. 따라서 진품은 아니다.


다음엔 호구산. 춘추전국시대 말기 (기원전 770년~476년)에 오나라 왕 부차가 그의 아버지 합려의 묘역으로 조성한 곳이다. 그를 매장한 지 3일째 되던 날에 하얀 호랑이가 나타나서 무덤을 지켰다는 전설 때문에 호구(虎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편 호구산 입구 오른쪽에서 시금석도 볼 수 있는데 오왕 합려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해 보기 위해 잘랐다는 전설이 있는 돌로 실제로 가운데가 둘로 쪼개져 있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다.

오(소주) 나라와 월(항주) 나라는 서로 앙숙이다 (오월동주). 오나라가 쳐들어왔는데 월나라는 싸워 이길 길이 없어 죄수 500명에게 말한다. 어차피 죽을 목숨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 그 대신 식솔들은 책임을 지겠노라고...


죄수 500명에게 병사복을 입혀 성밖에 줄을 세운 후 외친다. "병사들이여, 충성심을 보여라". 월나라 왕 구천의 명에 500명의 죄수들은 자결을 한다. 이 모습을 본 오나라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싸움에 이겨도 왕의 한마디에 죽을 수도 있다 생각하여 전의를 상실했고 이때 구천의 병사 3만 명은 오나라와 비장의 각오로 싸운다. 오나라의 왕 합려는 퇴각하던 중 발가락이 창에 찔려 고생하다 죽는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호구산에 합려왕을 묻는다.


호구산에는 천인석이라는 넓고 붉은 바위가 있다. 인부 1000명을 데리고 부차는 비밀리에 묘역을 조성했고, 일이 끝난 후 부차는 이들을 전부 목을 베었는데 그 피로 바위가 빨갛게 물들었다는 것이다.


오 나라의 부차는 3년 후에 다시 월 나라에 쳐들어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구천을 생포한다. 오 나라로 끌고 와 3년간 머슴살이를 시키던 중 부차는 병에 걸리게 된다. 용한 의원도 못 고치는데 구천은 자신이 의학에 대해 알고 있으니 고쳐보겠다고 하고 부차의 똥을 맛보고 3일 후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한다.

정말로 3일 후에 부차는 일어났고 이에 감동을 받아 구천을 월 나라에 돌려보낸다. 이에 오 나라의 오자서 장군과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는 구천을 돌려보내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 만류하지만 부차는 "그럼 너는 내 똥을 맛볼 수 있느냐" 고 반문하고 칼을 선사한다. 이에 오자서 장군은 자결을 한다.


한편 월 나라의 구천은 쓸개 맛을 보고 가시덤불 위에서 자며 (와신상담) 원수를 갚기 위한 칼날을 간다. 그는 월 나라의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보낸다. 서시에게 미친 부차는 정치를 돌보지 않는다. 구천은 또 좋은 목재를 오 나라에 보낸다. 부차는 궁전을 짓기 시작하고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만 간다.

월 나라의 구천은 불린 쌀을 오 나라에 보낸다. 불린 쌀로 농사를 지은 오 나라는 흉년이 들고 양식은 바닥나버렸다. 이때를 틈타 월 나라의 구천은 오 나라를 꺾었다.

합려왕의 묘에 보검과 금은보화가 묻혀있다는 소문을 듣고 진시황은 보검을 찾으러 3번이나 왔었으나 묘는 찾지 못했다.

1956년 이곳에 심한 가뭄으로 호구산 검지의 물이 마른 적이 있었다. 샘을 파는 과정에서 돌무덤 , 돌비석이 발견되었고 이것으로 검지가 합려왕의 무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부차는 아버지의 묘가 파헤쳐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연못 밑에 수장을 했던 것이다. 검지는 호구산 밑으로 깊이 파여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부차가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합려왕 무덤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샘을 파 그곳이 합려왕의 무덤으로 오인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검지 위쪽으로 돌다리가 있다. 부차의 사랑이며 중국 4대 미인중 하나인 서시는 자신의 얼굴을 돌다리 위에서 검지의 물에 비추어 보았다. '그 당시는 거울이 없었나?' 이에 부차는 서시가 빠질까 봐 돌다리 위에 두 개의 구멍을 뚫었다. 하나는 서시의 거울, 또 하나는 부차의 거울로.

(중국 4대 미인 ; 왕소군, 양귀비, 초선, 서시)


검지 위쪽으로 호구탑이 있다. 906년에 세워졌는데 벽돌로 만들어 있고, 12도 기울어져 있어 동방의 피사의 사탑이라 한다. 기울어지는 이유는 검지가 발견되기 이전에 검지 위에 탑이 세워졌고 연못 위의 지반이 약해지면서 기울어진다고...


호구산은 전설이 많은 곳이다. 옛날 한 농군이 농사를 짓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던 두 노인이 있어. 이를 구경하고 돌아오려는데 영 집을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는 자신의 몇 대 손자였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따져보니 200년의 세월이 지났던 것이다. 이 전설에서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나왔다고 하는데 , 호구산엔 그 두 신선의 모습이 돌에 새겨져 있다.


다음에 간 곳은 졸정원.

명나라 때 왕 헌신이 관직에서 추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1522년 조성되었다. 왕 헌신은 졸장부들이 정치를 하고 있다는 뜻으로 졸정원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부정부패를 한 관리일지언정 졸정원을 꾸민 그의 능력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심미안은 놀랍다. 훌륭한 건축가다.

소주의 특산품 비단 솜을 사고 우리의 차는 항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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