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_9895
우리는 종종 “창의성은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똑똑해도, 기계는 결코 인간처럼 창의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런데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에서 그 믿음은 흔들렸다. 해설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알파고의 창의적인 수.” 순간 많은 사람들은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이다. “어라, 창의성은 인간의 전매특허 아니었나?”
창의성의 신화는 무너지고 있는가
칸트는 창의성을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독창성”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알파고는 인간이 규칙이라고 여긴 바둑의 문법을 넘어섰다. 그 수는 인간 세계에서는 “천재적”이라 불렸고, 컴퓨터 세계에서는 “계산 결과”였다. 그렇다면 창의성은 정말 인간만의 영역일까, 아니면 우리가 ‘계산할 수 없다고 착각했던 무언가’일까?
하라리의 말처럼, 인간의 역사는 신화와 개념을 믿음으로써 움직여 왔다. “창의성은 인간만의 것”이라는 믿음도 그 신화 중 하나일 수 있다. 종교는 창의성을 신적 능력의 모방으로 설명했고, 예술은 그것을 천재의 증거로 신격화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음악을 작곡하고, 새로운 영상을 편집하는 오늘, 이 믿음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바둑판에서 예술의 무대까지
2025년의 바둑계에서는 “창의적인 수는 곧 기본적인 수”라는 말이 회자된다. 인간이 기발하다고 떠받들던 수를, 인공지능은 단순히 “기본을 지킨 결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창의성은 단순히 엉뚱한 파격이 아니라, 본질을 가장 깊이 이해했을 때 나오는 산물일지도 모른다.
이 통찰은 예술에도 적용된다. 학생들에게 “걱정하지 마라, 창의성은 인간만의 것이니까”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 말에 자신이 없다. 인공지능은 이미 놀라운 속도로 새로운 편집 방식과 영상 문법을 창조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창의성이란 정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것’일까?
인간의 몫은 어디에 있는가
하이데거는 예술을 “진리의 출현”이라고 말했다. 즉, 예술의 가치는 그저 낯선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드는 데 있다. 인공지능이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놓을 수는 있지만, 그 결과가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해석하는 주체는 여전히 인간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의 창의성을 ‘밈(meme)’의 재조합으로 설명했다. 기존의 생각들을 변형하고 다시 엮어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것도 결국 밈의 새로운 조합일 뿐이다. 차이는, 인간은 그 조합에 ‘살아 있는 경험’을 불어넣는다는 점이다. 인공지능이 영상을 편집할 수는 있어도, 상실의 아픔이나 첫사랑의 설렘을 진짜로 느끼지는 못한다.
창의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주된다
우리는 종종 창의성을 “세상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두 번째 순간부터는 이미 모방이 된다. 그렇다면 진짜 창의성이란 “세상에 없던 것을 처음 내놓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인공지능이 새로운 영상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영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 창의성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의미를 묻고 삶을 해석하는 능력이다.”
결국 창의성은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대결에서 사라질 단어가 아니라, 오히려 더 확장될 단어다. 인공지능이 계산으로 새로운 길을 보여줄 수 있다면, 인간은 그 길을 따라가며 “이 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물을 수 있다. 계산은 기계가 하지만, 질문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그리고 질문하는 능력, 바로 그곳에서 인간의 창의성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