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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태어나면 반드시 두 가지를 얻는다.
엄마, 그리고 이름.
이 두 가지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이름은 다양한 신분증 속에 박히고,
직함도, 역할도 수시로 달라지지만
엄마의 호칭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는다.
그건 생물학을 넘어선 존재의 첫 번째 언어다.
오늘 아침,
엄마에게서 갑작스러운 전화가 걸려왔다.
첫마디는 다짜고짜였다.
“너 어디 아프니?”
그 한마디에 웃음이 났다.
이게 바로 ‘엄마의 마음’이라는 걸 나는 안다.
별다른 이유도, 특별한 계기도 없다.
그저 마음 한켠에서 불안이 일면
엄마는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건다.
나는 이제 중년이다.
스스로 꽤 단단해졌다고 믿지만,
엄마 앞에서는 여전히 초등학생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
전화를 걸면 엄마는 늘 묻는다.
“밥은 먹었니?”
그다음엔 “요즘 피곤하지?”
그리고 대화의 마지막엔 어김없이,
“너무 무리하지 마라.”
한마디로 요약하면,
엄마의 모든 문장은 ‘걱정’으로 수렴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걱정이 귀찮다가도
하루가 끝나면 그 목소리가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엄마의 걱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진화론적으로 보자면,
어쩌면 인류 최초의 감정이 ‘걱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호모 사피엔스의 한 어미가
어린 자식이 동굴 밖으로 나가는 걸 보며
“저 녀석, 또 맹수한테 잡히면 어쩌지?”
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순간—
인류는 ‘공감’이라는 능력을 얻었을 것이다.
걱정은 그렇게 사랑의 원형으로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걱정은 나이를 먹어도 식지 않는다.
그건 조건 없는 사랑의 증거이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습관이다.
어쩌면 인류가 이렇게 오래 살아남은 건
그 끈질긴 걱정 덕분일지도 모른다.
사냥감을 쫓는 용기보다,
돌아오지 않은 자식을 기다리는 불안이
더 오래 인간을 붙잡아두었을 테니까.
나도 이젠 누군가를 ‘걱정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는 건
인생의 또 다른 성숙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엄마의 걱정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 몸에서 나왔지만, 여전히 내 마음 안에 있다.”
이제 나는 조금은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엄마의 걱정은 불안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하는 언어라는 것을.
그 걱정이 나를 귀찮게 하는 날엔,
이렇게 생각해본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여기까지 이어온 건,
결국 엄마의 걱정 덕분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