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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화는 더 이상 인간의 독점적 예술이 아니다.
이 문장은 다소 불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 나의 작업실 풍경을 떠올려보면, 부정하기도 어렵다.
얼마 전, 나는 소설의 한 장면을 영상으로 실험해보려고 생성형 AI 툴을 열었다.
예전 같으면 감독, 촬영감독, 조명감독, 미술팀, 배우까지—
적어도 열 명은 모여야 가능했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화면 안에서는, 내 손끝의 몇 줄 문장만으로
하늘은 붉게 물들고, 바람은 서늘하게 불고, 인물은 감정에 젖어 있었다.
나는 마치 ‘나도 모르게 감독이 된 사람’처럼 모니터 앞에서 멀뚱히 서 있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제 영화는 예술가들의 비밀 아지트가 아니다.
인간이 독점하던 무대 위에, AI라는 새로운 배우가 올라왔다.
물론, 이 말은 “AI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단순한 공포가 아니다.
AI는 조용한 태도로 장비를 꺼내 들고,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참여할 뿐이다.
오히려 문제는 인간 쪽이다.
우리는 수십 년간 영화라는 숭고한 예술을
“인간만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AI가 슬쩍 1인분을 해내면, 마음 한구석이 뒤숭숭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 변화는 위기가 아니라 질문의 시작이다.
“도대체 영화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카메라는 누구나 들 수 있지만
‘어떤 장면을 왜 찍는가’를 묻는 질문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AI는 빛을 계산하지만
빛의 의미를 설계하는 것은 인간의 사유다.
아이러니하게도, AI가 등장한 시대에 오히려 인간의 존재감이 다시 선명해진다.
기계가 뚝딱 만들어내는 장면 앞에서
나는 내가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사랑하는지
다시 확인하게 된다.
모니터 앞에서 길을 잃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 셈이다.
아마 미래의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질 것이다.
AI가 초안을 만들고, 인간이 의도를 더하고,
다시 AI가 장면을 짜고, 인간이 감정을 조율하는 방식으로.
그건 기술의 침범이 아니다.
예술이 새로운 형식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 모든 변화 속에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영화는 더 이상 인간의 독점물이 아니지만,
인간이 사라지는 예술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야말로,
AI가 따라 할 수 없는 인간만의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