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91_몸이 보내는 ‘가장 정직한 편지’
우편함을 열었을 때만 해도 별 감정이 없었다.
광고 전단지 사이에 꽂힌 건강검진 결과 봉투—
그저 “아, 왔네.” 정도의 생각.
그런데 문제는,
내 기대보다 숫자들이 조금… 솔직했다는 점이다.
빈혈, 콜레스테롤, 혈압.
마치 의사 선생님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했다.
“자네, 나이를 속일 순 없어.”
검사표를 자세히 들여다 보는 동안 내내 마음은 묘하게 출렁였다.
평소 건강을 꽤 신경 쓰는 편이었기에,
더 정확히 말하면 나름 잘 챙긴다고 믿고 있었기에,
이 결과는 작은 배신처럼 느껴졌다.
가장 충격이었던 건 결과가 아니라 내 반응이었다
“왜 이래… 나 꽤 신경쓰면서 살았는데?”
“이보다 더 어떻게 관리하라고?”
순식간에 억울함, 자책, 서운함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건강검진 결과는 내 삶을 평가하려는 게 아니라,
내 몸이 할 말이 있다는 신호였다는 걸.
몸은 결코 갑자기 무너지지 않는다.
조용히, 천천히, 꾸준히 요청한다.
다만 우리가 못 들을 뿐이다.
결국 문제는 ‘잘못된 습관’이 아니라 ‘내가 나를 과신한 것’이었다
나는 건강을 꽤 안다고 생각했다.
식습관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식욕 앞에서의 무방비함’이라는 작은 구멍이
서서히 큰 균열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늘 큰 잘못 때문에 병이 오는 줄 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작고 반복되는 선택이다.
야식 한 번, 한 숟가락 더, “오늘만 괜찮겠지”라고 말하는 순간들.
결과지는 그 모든 순간을 조용히 합산한 영수증이었다.
걷는 동안, 나는 내 몸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결과지를 본 날, 마음이 복잡해 밖으로 나섰다.
걷다 보니 신기하게도 감정이 가라앉았다.
내 몸이 말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미워하지 말고, 그냥 천천히 다시 시작하자고.”
그때 깨달았다.
건강검진은 ‘겁주는 행사’가 아니라
나와 내 몸이 오랜만에 깊이 대화하는 연례 미팅이라는 걸.
건강은 숫자가 아니라 관계다
건강은 ‘좋다/나쁘다’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건강은 매일 새로 쓰는 관계의 기록이다.
오늘 잘해주면 내일 웃어주고,
며칠 소홀히 하면 바로 신호를 보낸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관계보다도 더 정직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건강 관리’라는 말 대신
‘몸과의 관계 맺기’라는 표현을 더 자주 떠올린다.
앞으로 더 걷고, 더 듣고,
내 몸에게 더 자주 미안하다 말하고
가끔은 작은 선물도 줄 생각이다.
(단, 초코 케이크 같은 ‘유혹적인 선물’은 제외다.
그건 관계 회복이 아니라 스캔들이다.)
건강검진 결과는 좋고 나쁨의 통보가 아니라,
내 몸이 건네는 가장 진심 어린 제안이다.
“우리, 다시 잘 지내보자.”
이제 나는 그 제안에 조용히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