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의 언어로 사람을 잇는다는 것
얼마 전, 직장 동료와의 대화 속에서 뜻밖의 전환점을 마주했다.
사소한 업무 이야기를 나누다가 흘러나온 말 한마디,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하려 했지만, 결국 내 원칙에 어긋났어.”
그 말은 마치 오래된 질문 하나를 꺼내는 열쇠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해'보다 '원칙'을 우선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정말, 둘은 공존할 수 없는 걸까?
요즘 조직 안에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건 세대 간 갈등이다.
신구 간의 불협화음, 보이지 않는 권력의 긴장, 태도에 대한 불만.
그러나 모든 갈등의 뿌리는 결국 '원칙'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세상에서 시작된다.
그 세상은 주로 구세대가 들고 있다.
그 세상은 변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렇게 해왔다”는 말을 기준점으로 삼는다.
반면 새로운 세대는 그 세상을 변화시키려 한다.
“우리는 이렇게 하고 싶다”는 감각의 나침반으로 움직인다.
결국 충돌은 예고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충돌이 해결되기보다 더 깊이 굳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유발 하라리는 이 시대를 “코쿤(Cocoon)의 시대”라고 표현한다.
이는 사람들이 각자의 ‘인지적 누에고치’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이 보고 싶은 정보만을 선택하고, 듣고 싶은 목소리만을 들으며,
마침내는 자기 확신 속에 고립되어 가는 현상을 뜻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이 연결된 듯 보이지만,
실상은 알고리즘이 짜준 취향의 울타리 안에서
동질적인 의견과 감정만을 순환시키며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선택적 소통은 다양성을 차단하고,
‘대화’가 아닌 ‘확인’을 위한 커뮤니케이션만 남긴다.
결과적으로 코쿤의 시대는, 소통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타인의 관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역설의 시대다.
진짜 대화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자신과 다른 관점 앞에서 무장해제를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코쿤을 찢고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내가 찾은 한 줄기 실마리는 바로, 연민이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측은지심.
여기서 말하는 연민은 ‘불쌍히 여김’이 아니다.
상대의 서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
그의 말투, 표정, 침묵 조차도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자세.
그 연민이 없으면, 원칙은 단지 벽이 된다.
하지만 연민이 함께하면, 원칙은 다리로 바뀐다.
나는 요즘 그렇게 믿으려 한다.
원칙은 길이 되어야 하고, 연민은 그 길 위를 함께 걷는 방향이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틀린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기준이 아니라, 더 깊은 연민이다.
연민 없는 원칙은 칼이 되고, 원칙 없는 연민은 길을 잃는다.
둘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진짜 대화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