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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함의 함정

감정을 흉내내는 시대,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by 인또삐

얼마 전, 인공지능이 교육에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다룬 자료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빠르게 정교해지는 AI 기술 덕분에, 이제는 학생의 성향과 이해도를 분석해 맞춤형 학습 경로를 제시하는 시대가 되었다.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변화다.

하지만 문득,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


‘AI가 친구보다, 부모보다, 선생님보다 더 친밀한 존재가 되어버린다면?’


AI는 언제나 친절하다. 지치지 않는다. 실망하지도 않는다.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도 하지 않는다. 언제든 나에게 집중해주고, 나의 질문에 즉각적으로 대답해준다. 갈등도, 눈치도 필요 없다. 이처럼 매끄럽고 안전한 관계 속에서 아이들은 안도감을 느낀다. 인간관계에서 겪는 좌절과 피로를 피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정말로 그것이 ‘관계’일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불렀다. 그 말 속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도록 태어났지만, 그 ‘함께’에는 언제나 마찰이 따른다. 오해하고, 실망하고, 때로는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사람다움’을 배워간다.


AI는 이 과정을 생략한다.


그것은 설계된 친절함이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인공지능이 더 정교해질수록, 인간의 감정을 더 그럴듯하게 ‘흉내내게’ 될 것이라고. 이미 우리는 그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어쩌면 우리의 아이들은 AI의 친밀함을 ‘진짜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이후, 반려동물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계의 단절 속에서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는 존재,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존재에게로 마음을 열었다. 그들이 선택한 대안이 반려동물이었다. 만약, 그마저도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결국 더 ‘완벽한 위로자’를 찾게 될 것이다. AI는 그 틈을 파고든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의 기준점이 필요하다.
AI를 받아들이되, 그것이 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태도.


2016년, 인류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통해 AI의 가능성을 실감했다. 알파고는 인간을 이겼고, 우리는 경악했다. 그러나 곧 질문이 떠오른다.


“알파고는 승리에 기뻐했을까?”
“그는 밤을 새워가며 패배를 두려워했을까?”


아니다. 알파고는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승리도 패배도, 그에겐 그저 데이터일 뿐이다.

AI는 의식이 없다.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계산’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감정처럼 느끼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친밀함’이라는 환상에 너무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진짜 교육은 마음을 흔드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교육은 질문해야 한다.
“왜 AI는 나를 이해하는 것 같은데, 사람과의 대화는 이렇게 어려울까?”
“이 친밀함은 진짜인가?”

우리가 이 질문에서 도망치지 않을 때, 아이들은 ‘기술의 편리함’ 속에서도 사람과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AI는 도구이자 협력자다. 친구가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그 경계를 혼동하지 않도록, 지금 우리는 다시 ‘관계의 본질’을 가르쳐야 한다.

그 친밀함이 진짜인지 묻는 자,
그가 바로 다음 세대를 이끄는 진짜 교육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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