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GeoSentinel

<배터리 제국: 중국 전기차 산업이 바꾼 세계> (2)

1장. 말라카 해협에서 시작된 전기차 전략 上

by 아틀라스

중국의 에너지 안보 딜레마

2003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중앙 경제공작회의에서처음으로 ’말라카 딜레마(Malacca Dilemma)’라는 개념을 언급했다. 중국의 석유 수입 대부분이 말라카 해협이라는 좁은 수로를 통과해야 하는 전략적 취약점을 지칭한 이 개념은,이후 중국의 에너지 안보 전략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해로를 이용해 중국으로 운반되는 에너지는 반드시 말라카 해협을 거친다.


말라카 해협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 가장 좁은 곳의 폭이 약 2.8km에 불과하다. 이 좁은 수로는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석유 수송의 핵심 경로로, 중국 석유 수입의 약 80%가 이 해협을 통과한다. 문제는 이 해협이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해군력 영향권 아래 있다는 점이다. 미중 관계가 악화될 경우, 이 해협을 통한 석유 수송이 차단될 위험이 존재한다.


이 취약성은 단순한 가설이 아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의 석유 수입 의존도는 급격히 증가했다. 1993년 중국은 석유 순수입국으로 전환되었고, 2013년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이 되었다. 2020년 기준 중국의 석유 수입 의존도는 73%에 달하며, 이 중 대부분이 말라카 해협을 통과해야 한다.


이러한 에너지 안보 위험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중국이 ’구단선(Nine-Dash Line)’을 통해 남중국해의 대부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지역의 에너지 자원과 해상 교통로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다. 미국 지질조사국에 따르면 남중국해에는 약 110억배럴의 석유와 190조 입방피트의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는것으로 추정된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중국의 '구단선'. 파란선은 대만이 주장하는 '십일단선'


미국의 ‘자유항행작전’과 인도-태평양 전략은 이러한 중국의 에너지 안보 우려를 더욱 심화시켰다. 특히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해양 통제가 자국의 에너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는 중국이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모색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내연기관 추격의 한계와 패러다임 전환의 기회

중국이 전기차 산업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게 된 또 다른 배경은 내연기관 자동차 기술에서의 지속적인 열세였다. 1980년대부터 중국은 폭스바겐, GM, 도요타와 같은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과의 합작을 통해 자동차 산업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양날의 검이었다.


합작은 중국 기업들이 단기간에 생산 능력을 확보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핵심 기술의 종속으로 이어졌다. 상하이자동차는 폭스바겐 및 GM과, 둥펑자동차는 닛산 및 혼다와, 제일자동차는 토요타 및 폭스바겐과 합작했지만, 엔진과 변속기 같은 핵심 기술은 여전히 외국 파트너의 통제 아래 있었다.


중국 자동차회사와 폭스바겐의 합작회사들을 설명한 도표


2000년대 초반까지도 중국 자동차 브랜드들은 품질, 브랜드 인지도, 기술력 면에서 외국 브랜드에 크게 뒤처졌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은 이미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성숙 산업으로, 내연기관 기술에서 독일, 일본, 미국 기업들을 따라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기차는 기존의 게임 룰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의 창’으로 인식되었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약 3만 개의 부품으로 구성되는 복잡한 기계 시스템인 반면, 전기차는 배터리, 모터, 전자제어 시스템을 중심으로 한 상대적으로 단순한 구조를 가진다. 이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에서는 모든 경쟁자가 비슷한 출발선에 서 있었고, 중국은 ‘후발자’가 아닌 ‘선도자’가 될 가능성을 보았다.


기술 혁신 이론에서 말하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의 관점에서 보면, 기존 내연기관 강자들은 오히려 전기차로의 전환에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내연기관 관련 시설과 기술에 막대한 투자를 해왔고, 이런 자산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반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이런 부담이 적었고, 전기차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과감히 베팅할 수 있었다.


2009년: 중국 전기차 전략의 출발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중국에게 역설적으로 산업구조를 근본적으로 전환할 기회가 되었다. 위기 이전까지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서 저임금, 저부가가치 제조업에 기반한 수출 주도 성장 모델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인한 글로벌 수요 감소는 이러한 성장 모델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냈다.


2009년 1월, 중국 국무원은 「자동차산업 조정 및 진흥 규획」을 발표하며 전기차를 포함한 신에너지 자동차 산업 육성을 공식화했다. 같은 해 3월에는 「10개 산업 진흥 계획」을 통해 자동차 산업을 10대 핵심 육성 산업으로 지정했다. 이 시기는 중국이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저부가가치에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대전환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2009년에 시작된 ‘10개 도시, 1000대 전기차 시범사업’은 중국의 전기차 산업정책의 시발점이었다. 초기에는 창춘, 상하이, 선전, 항저우 등 13개 도시에서 각각 1,000대의 전기차를 공공부문에 도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이후 확대되어 2010년에는 25개 도시로, 2011년에는 일반 소비자 대상 보조금 정책으로 진화했다.


당시 원자바오 총리는 전기차를 중국의 ‘리프로그(leapfrog, 도약)’ 전략의 핵심으로 언급했다. 리프로그 전략이란 기존 단계를 건너뛰고 최신 기술로 바로 진입하는 접근법을 의미한다. 100년 된 내연기관 기술의 점진적 개선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전기차 기술에 집중함으로써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단숨에 줄이겠다는 전략이었다.


중국의 초기 전기차 정책은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전체 산업 생태계 구축에 초점을 맞췄다. 배터리, 모터, 전자제어 시스템, 충전 인프라를 포함한 전체 가치 사슬을 육성하는 종합적 접근법을 취했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는 초기부터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중국 정부는 2009년부터 배터리 연구개발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했고, 이는 훗날 CATL과 BYD가 세계적인 배터리 강자로 부상하는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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