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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Kim Jun 23. 2021

생각의 크기가 삶의 크기를 좌우한다.

머리는 하늘에 두되 두 발은 땅을 굳게 딛고.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머리는 하늘에 두되 두 발은 땅을 굳게 딛고 있어야 한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님이 하신 말씀이다.

꿈은 최대한 높게 가지되, 현실을 직시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현실을 간과한 채 이상만 추구하면 안 된다.



20대 중반, UN과 같은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는 것을 꿈꾸며 현실에서는 컨설턴트로 매번 다른 클라이언트 사이트에서 정보시스템에 대한 취약점을 찾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목표로 삼은 UN 관련 글과 거기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지를 알아봤다. 그러다 위에서 말한 반기문 사무총장님의 글을 읽게 되었고, 몇 년 전 한국에 돌아오셔서 학교에서 특강 하셨을 때도 신청해서 참석했는데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내 주변에 존경하는 선배 중에서 국제기구에 가 계신 분이 없었다면, 나는 국내에서만 일했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보고 듣는 세상에서는 그게 다 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 좋게 첫 번째 직장 팀장님이 아시아개발은행이라는 국제금융기구로 옮기시면서 내 시야는 세계로 넓어졌다. 그 덕분에 지금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 내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으면서 지낼 수 있게 됨에 많이 감사한 마음이다.


사람은 좋은 말을 들어도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아야지 사람은 변한다고 한다. 그래서 내 공식적인 커리어에서는 지웠지만 잠깐 일했던 회사에서 만난 자문위원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먼 곳이 어딘지 아세요?"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 입니다"

다들 좋은 글을 읽고 좋은 방법을 듣고 해도 다 아는 말이고 다 들어본 내용이지만, 그게 마음에 전달되었을 때 사람은 서서히 변할 수 있게 된다.


나도 수많은 책들과 앞서 나가신 인생의 선배님들의 글을 보면서 하나씩 나에게도 적용을 해 나갔다. 그중에서도 생각의 크기가 삶의 크기를 좌우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가 20대 초반에는 주변을 둘러봐도 딱히 성공한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딱 그 정도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20대 중반부터 생각을 바꿨다.


"그래 내 주변에서 먼저 가장 성공한, 내가 롤모델로 삼고 싶은, 나보다 5살 에서 10살 정도 더 많은 형님들을 찾아보자."


그렇게 세 분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한분은 글로벌 컨설팅 펌에서 일하는 형, 한 분은 국내 대학교수로 일하는 형, 그리고 다른 한 분은 국제금융기구에서 일하는 형. 당시 나는 50여 명 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학부도 SKY 출신이 아니었고, 아직 학사도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생각할 때 내 세상과 내 생각을 넓혀줄 분들이었다. 그 형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아직 나는 초라했지만, 함께 그 정도 위치에 가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물론 그 목표에 가기 위한 동력은 현실적인 가난이기도 했다. 참, 가난이라는 표현을 글로 쓰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든다. 확실히 예전엔 가난했다. 금전적으로 돈이 없어서 지나쳐온 정거장을 걸어서 집으로 가야 하기도 했다. 지금은 내가 가난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의 삶이 만족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20대 후반, 첫 번째 롤모델이었던 형과 같은 회사, 글로벌 컨설팅 펌에서 일하게 되었다. 면접하고 입사 당시에는 고졸이었다. SKY에, 회계사, 변호사, 해외 아이비리그 출신, MBA가 들어가는 회사에 아직 대학도 안 끝난 서울 중간 대학 학부 출신이 들어간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이었다.


30대 중반, 두 번째 롤모델이었던 형이 일하는 대학에 대내외 직함으로는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석사를 끝낸 상태로 박사는 없었다. 산학협력중점교수라는 이름으로 매년 계약해야 하는 구조였지만, 그 시절이 가장 내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난 두 번째 롤모델이었던 형과 같은 조직에서 같은 직업(물론 전임교수와는 대우가 달랐지만)을 갖게 되었다.


40살, 마흔. 박사를 마치고 해외로 나왔다. 정부 간 국제기구이면서 대학교인 곳으로 왔다. 공항에 도착해서 학교까지 외교차량으로 왔다. 그리고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것 외로도, 유엔 마약범죄 사무소 (UNODC), 인터폴, 유로폴, ITU, ICANN, 유럽연합(EU)과 회의하고 때로는 내 이름으로 발표도 하면서 국제기구와 국제사회에 한국인으로서 내 이름을 알리고 있다. 어제는 학교에 유엔 마약범죄 사무소 중동지역 최고 디렉터가 학교에 와서 인사 나누고 내가 맡고 있는 랩과 연구내용을 소개해드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시골에서 태어나 하루 7만 원 받으며 아르바이트하고, 고시원에 살면서 월급도 받지 못하고 일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생각의 크기가 삶의 크기를 바꾼다. 나는 직업적으로는 교수와 멘토링과 강의로 계속 말을 해야 하는 직업이지만, 평소에는 말을 잘하지 않고 주로 생각에 많이 잠기는 편이다. 어떻게 하면 내 꿈에 다가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만족시키면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생각을 수시로 메모해 놓는 습관을 갖고 있다.


생각의 크기가 삶의 크기를 바꾸지만, 생각의 크기를 넓히기가 쉽지 않다. 우리네 삶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거기에 소중한 시간을 쏟기보다, 본인의 찬란한 미래 모습을 상상하고, 그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의 지평을 넓히면, 그곳으로 한 발짝씩 가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보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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