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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드로스치 Apr 19. 2024

AS(2)

디아와 플로피의 출장은 예상외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이 떠난 지 오일이 되던 날 논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환생궁에서 삼신을 돕고 있었다. 

최근에 점지를 신청한 부모들의 자격상태를 점검 중이었는데 논은 그 기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났을 경우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만큼 가난했지만 점지를 받을 수 있다고 되어있었고 어떤 부모는 둘 다 건강하고 좋은 직업에 매우 부유했지만 삼신의 일대일 점지는 받을 수 없고 다수의 영혼들과 매칭하는 랜덤 점지 대상이  되었다. 

현재 논이 점지받을 영혼을 찾아야 하는 예비 부모 역시 논이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진 부부였다.   남편은 다리 장애를 가진 자로 경제 활동이 힘들 만큼 장애가 심했고,  아내는 일을 했지만 벌이가 시원찮은 지 가정형편이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행점수가 매우 높은 영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예비부모 후보였다. 논은 이 부모가 왜 후보가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논님, 후보 부부들에 이상이 있나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의 논을 보고 삼신이  물어봤다.


“네…이 부모는 아무리 봐도…. 장애가 있는 데다 매우 가난해요… 그렇게 부자가 될 수 있을 만큼의 능력도 안 보이고요… 꼭… 그…”


논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꼭... 그 재판 중인 죄인의 부모들과 조건이 같아 보이나요?”


정곡을 찌른 삼신의 말에 논은 대답하지 못한 채 화면만 바라봤다.


“그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여기를 클릭해 볼래요?”


삼신의 말대로 버튼을 클릭하자  부부에 대한 부연 설명이 첨부되어 있었다.


“예비부모의 남편은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었어요. 대신 그날 거기 있던 어린아이의 생명을 구했지요.  아내는  보시다시피 선행을 일상생활에서 펼치고 있고요. 이 부부의 선행점수는 이번에 올라온 부부의 후보들 중 가장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 선행을 한다고 해서… 그게 꼭 좋은 부모인가요? 자식을 위한 경제적인 받침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데요. 경제적인 조건은 환생국에서는 보지 않는 조건인가요?”


“경제적인 조건도 당연히 봅니다. 선행점수로만 본다면 이 부부가 최고 점을 받았겠지만 부족한 점들도 있기 때문에 최고 점을 갖는 부부들 명단에 있지는 않은 거지요. 아시다시피 최고점을 받은 부부들은 후보들로 영혼님이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바로 일대일 점지를 해드리지요. “


“하지만… 삼신님, 선행점수가 높다고 해서 꼭 아이를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요. 워낙 선행 점수가 높으니 랜덤 대상은 아니 더라 해도 그래도… 저는 이 분들이 왜 높은 포인트의 영혼분들이 점지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바로 그거예요.”


“네?”


“아이에 대한 사랑이요. 아이를 이미 낳은 부모야 저희가 어느 정도 확인을 하지만, 첫 아이인 경우는 저희가 확인하는 정확한 방법은 없지요. 그래서 예비부모의 평소 생명에 대한 태도와 사랑에 대한 것을 보고 판단하는데… 여기 보세요…”


삼신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부부의 애정도와, 생명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 점수가 매우 높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예의와 배려 등 인간관계에 관련된 모든 점수들이 모두 평균을 웃돌았다.


“이 부부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존중이 매우 높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매달 규칙적으로 기부하는 곳도 어린이를 위한 단체이고요. 만약 환생을 하는 영혼님이  부모의 경제력을 가장 우선시한다면 이 부부는 후보에서 제외되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아 일전에도 있군요”


삼신의 말에 논은 영혼 3512번이 생각났다. 예상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당한 그 영혼은 최종 점지 선택에서 남은 두 후보 중에 장애가 있는 부모를 골랐었다. 그때 논은 다른 쪽 부부가 경제력도 더 뛰어나고 부모의 직업도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영혼 3512번이 망설임 없이 두 부부 중에 장애가 있는 쪽을 선택해서 그 연유를 물어봤던 기억이 났다.


“더 사랑받을 거 같아서요. 듬뿍 사랑받고 살고 싶어요.”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영혼님은 어떤 점을 보고 자신이 더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적어도 경제력은 돈이니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사랑받고 살면 더 행복할까?


생각에 빠진 논의 귓가에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진득한 혀 세 개가 뺨에 닿자 논은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번쩍 일어났다. 


“플로피~”


“거봐. 또 놀라지. 논은 항상 놀란다.”


“아… 내가 졌다. “


“논, 겁이 너무 많다. 어떻게 매번 놀라냐.”


짓궂게 놀리는 플로피가 반가워 논은 놀란 것도 잊어버리고 플로피의 몸을 폭 껴안았다. 플로피의 꼬리가 살랑살랑 논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플로피 보고 싶었어.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디아는?”


논의 물음에 플로피는 논의 품에 안긴 채  가운데 머리가 고개를 삼신 쪽으로 돌리고는 이야기하였다. 


“삼신님, 디아는 보고를 위해 옆 회의실에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논과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논님, 오늘은 그만 들어가셔도 되니 플로피와 즐거운 시간 보내셔요. 디아도 금방 보내드리겠습니다.”


삼신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옆 회의실로 이동하자 논은 신이 나 소리 없이 고함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플로피도 논의 흉내를 내듯 소리 내지 않고 짖으며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둘은 서로를 보고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어가며  책상 위의 자료들을 간단히 정리하고 이른 퇴근을 준비하였다.


오랜만에 함께하는 퇴근길은 너무도 즐거웠다. 논과 플로피와 디아는 이것저것 서로 안부를 물으며 환생궁에서 바로 연결된 출구를 통해 말라크들이 사는 마을로 이동을 하였다.


“플로피 오랜만에 지옥으로 갔잖아. 거긴  어땠어? 그리고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거야? 그 죄인은 어떻게 되었고?”


“하나씩 물어봐라. 논, 나는 지옥은 좋았다.”


“나도"


“나도"


플로피의 대답에 논은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옥을 좋아하다니! 


“재판도 재판이지만 검토가 오래 걸렸어. 죄인이 직접 점지의 문제를 제기했으니까. 그 죄인은 랜덤점지를 받은 경운데 본인이 선행포인트가 낮다 해도 그 부모가 이 죄인이 전생에서 지은 포인트와 맞는 부모인가 의문을 제기했지. 그리고 자기 포인트의 점수에 미치지 못한  부모를 만났는데 죄를 짓는 삶을 산 게 어쩔 수 없지 않았냐는 거지.”


디아의 말에 논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에이.. 그건 말도 안 된다. 부모의 선행점수가 낮다고 그 자식들이 다 죄를 짓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그 죄인… 상당히 똑똑하네.”


디아의 말에 플로피들이 맞장구를 쳤다.


“맞다. 아주 영리한 죄인이었다.”


“죄도, 아주 영리하게 지었지. “


“아주 악랄했다.”


“그래, 플로피의 말처럼 인간으로 살며 아주 악랄하고 똑똑하게 죄를 많이 지은 자였어. 자신은 그 벌을 다 받았다고 하지만 이곳에서의 관점으로는 아직도 남은 벌들이 컸지. 그자는 무조건 지옥행 이어야 했어. 그래서 우리는 일단 선례 자료들을 충분히 검토했어. 이 영혼과 비슷한 선행포인트를 갖은 영혼들이 랜덤점지를 통해 이런 류의 부모를 만났을 경우의 자료와, 랜덤으로 배정받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영혼들의 삶을 검토했지. 결과가 어땠을까, 논?”


“글쎄… 좋은 조건에서 태어난 영혼들이 좀 더 잘 살지 않았을까?”


“ 논, ‘잘 살다.’의 의미가 뭘까? 만약 그게 선행을 의미한다면… 대답은 ‘아니요'야. “


“그래?”


“인간의 삶에서의 질은 뭐 다를 순 있지. 경제적으로 좋고 외모가 뛰어나고 그러면 인간 기준의 성공도 하고 그러니…그런데 사후 지옥과 천국, 환생을 가르는 선행포인트로 본다면 처음의 조건들은 거의 영향이 없었지. 오히려 우린 재밌는 것을 찾았어.”


“그게 뭔데?”


“환생전에 보인 영혼의 태도. 

이번 재판에서 문제시된 것은 랜덤 환생. 랜덤 환생은 보통 선행포인트가 낮은 영혼들에 해당되지. 이 영혼들이 환생전 상담에서 보였던 태도가 그다음 삶에 영향이 가장 크다는 것을 알았어. 예를 들어 자신이 선행포인트를 못 받았다는 것에 대해 반성하고 아쉬워하는 쪽은 다음생애에서 좀 더 높은 선행점수를 받았고, 열심히 살았는데 겨우 이 정도냐고 자신의 선행점수를 인정하지 못하고, 반발심을 갖은 자들은 대부분 그다음생애에 지옥행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죄인도 후자의 경우였고.”


“게다가 그 영혼의 부모 좋았다.”


“응 뭐가?”


플로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논이 다시 물어보자 가운데 플로피가 대답했다.


“점지받기 전 평가되는 점수 말이다. 그 영혼이 랜덤점지받아서 점지받은 부모님들. 장애가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선행점수도 나쁘지 않았고, 경제력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이 랜덤이 아니었다면 점지받을 수 없는 조건이었지.”


“결국, 본인이 어떻게 사느냐가 제일 중요한 거구나.”


논의 말에 디아와 플로피 세 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물론 점지는 중요해. 인생의 처음을 시작하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지. “


“그런데 세상에는 진짜 말도 안 되는 부모들이 있잖아. 자신의 자식을 죽이는 부모도 있고…”


“그래, 그런 부모는 재판 없이 즉결 지옥이야. 그리고 아이의 영혼은 이곳에 다시 돌아와 세 번째 삼신님과 치유의 시간을 보내게 되지. 그리고 준비가 되었을 때 환생을 다시 하기도 하고, 아니면 이곳에 머무를 수 있지.”


“그렇구나… 그럼 랜덤점지가 원인은 아닌 게 밝혀져서 그 죄인은 지옥을 간 거야?”


“일단 죄인의 죄가 컸어.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의 더러운 죄를 지었지. 그자가 지옥행인 것은 정해진 결과였어. 다만 랜덤점지에 대한 검토 때문에 재판이 길어졌을 뿐이지. 그런데 랜덤점지가 왜 생긴 줄 아니? 너희들?”


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논이 플로피를 바라보자 플로피의 양쪽머리들이 고개를 저었다. 


“엥? 넌 아나?”


“어떻게 알아?”


“쯧쯧….” 


가운데 머리는 두 머리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고는 말을 이었다.


“시작은 선도 악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 때문이었지. 처음에는 오직 선인들만 삼신님이 직접 점지를 하셨다. 선택받은 깨끗한 영혼을 그만큼 깨끗한 영혼의 부모들에게 점지하는 것이지. 보통 그렇게 되면 그들의 다음삶도 선인일 확률이 매우 높았거든. 그런데 어느 날 삼신님의 눈에 보통 사람들이 보였지.”


“보통사람?”


어느새 논의 집 앞에 도착한  그들은 걸음을 멈춘 채 서서 대화를 나누었다.


“논, 너는 환생이 정해진 사람들 대부분이 어떤 영혼일 것 같나? 삼신님의 점지를 직접 받는 분들? “


“음… 처음에는 그렇다 생각했어. 그런데 환생 상담지에서 일을 돕다 보니 랜덤점지받는 분들이 꽤 많으시더라고"


“맞다. 이곳 환생국에 오는 영혼들은 대부분 선행 점수가 그저 그런 영혼들, 분명 점수는 낮지만 악인이 아니기에 지옥에 가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원래 삼신님의 점지 없이 그저 아이가 필요한 부모들에게게 점지되었는데, 삼신님의 가호가 없다 보니 배속에서 혹은 태어나자마자 죽는 생명도 많고 태어나 생명은 유지해도 몸이 약한 아이들이 너무 많았지. 그래서 삼신님은 그렇게 태어나는 그들에게도 모두 삼신의 가호를 주시길 원했어. 그래서 아예 삼신님의 가호를 프로그래밍해서 자동 점지가 되게끔 한 거지.”


“아…. 그럼… 그게 랜덤 점지라고? 그럼 오히려 좋아진 거네? 원래도 점지는 랜덤으로 되었던 거잖아.”


논의 말에 가운데 플로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영혼이 만들어질 때 그 영혼들은 모두 깨끗한 상태야. 이들의 점지를 위해 삼신님이 필요하셨던 거야. 그런데  삶을 산 후에도 지옥이나 천국을 가지 않고도 깨끗한 상태의 영혼들이 존재했던 거지. 그래서 삼신님은 이들까지도 점지를 해 주셨지. 그런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일반 영혼들을 그저 두실 수 없었던 거지.”


디아의 말에 논이 물었다.


“디아, 듣다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그렇게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면 그럼 한번 랜덤점지받은 영혼은 쭉 그다음삶도 계속 랜덤일 경우가 많아? 그렇게 쭉 랜덤 받은 영혼이 만약 열 번 삶을 잘 살아낸다면 굳이 삼신님이 일일이 점지를 안 해도 되는 건 아냐?”


“첫 삶을 시작한 영혼들 중에 두 번째 삶을 다시 살게 되는 영혼들이 몇 쯤 될 거 같아?”


“음… 첫 삶이니… 시작은 모두 깨끗한 영혼들이잖아. 정말 삶을 잘못 살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환생이지 않아?”


논의 말에 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깨끗한 영혼들인데 지옥행으로 바로 가는 영혼들이 항상 서넛이야. 그리고 천국행으로 오는 영혼은 매우 드물지. 보통은 환생행인데 다행인 것은 그들 대부분이 선행점수가 낮지 않아. 그런데 반복된 삶을 살다 보면  점수에 변화들이 생기지. 그런데 논… 정말 특이한 건 첫 번째 삶을 살았는데 선도 악도 아닌 그저 그런 점수를 받는 경우는 참 드물었다는 거야. 가끔 존재하는데 대부분 그들은 두 번째 삶에서 지옥행거나 혹은 거꾸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아. 계속 그저 그런 점수를 받는 경우는 정말 드물어. 선이든 악이든 열 번의 삶을 모두 치우치지 않게 산다는 거니까.”


“그럼 계속 랜덤점지만 받는 영혼은 없었어?”


 “매우 드물었지. 특히 첫 번째 삶 직후 지옥행은 아니지만 선행점수가 전혀 없이.. 그저 삶을 살아 낸  영혼은 내가 이곳에 있던 이래 손에 꼽혀.”


“그들 중 계속 랜덤 점지만 받은 자들도 있었어?”


“첫 삶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삶에서 랜덤 점지를 받고 열 번의 환생을 끝낸 영혼 중 하나는 이곳에 있지.”


“이곳에?”


“응, 환생꽃밭에서 오늘도 열심히 씨를 심고 있을걸?”


“아! 바르야?”


“응, 그 녀석 말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나름 매력이 있어. 전생들에 대해 한번 물어봐. 얼마나 평범하게도 열심히 살 수 있는지 그 녀석만큼 잘 아는 영혼은 없을 거야. 그리고… 9번째 삶까지 랜덤으로 산 영혼이 최근에 한 명 있었어. 지금은 보류지만…”


“보류?”


디아가 대답을 하려는데 그 순간 ‘꼬르륵’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 난 아니다. 플로피 너냐?”


“나는 아니다. 플로피 너잖아.”


“아니야.. 가운데 너지?”


“아이고 플로피들아. 어차피 몸은 하나인데 누구든 어때. 가자 나도 배고프다. 들어가자. 디아, 플로피.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배불리 먹자고!” 


 셋은 즐거운 마음으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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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여기저기 플래시가 터졌다. 윤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깊은 인사를 하고 기자회견장을 나섰다.


‘배우 장연경, 가족에게 버림받은 것은 나'


‘친모에게 학대받은 배우, 가족을 버리다.’


‘가족이 본인 이름으로 진 빚 갚지 않기로,  장윤경 소송시작'


기자회견을 마치고 자신의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엄마와 동생은 반박 인터뷰를 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 오해라고 사랑한다고, 어떤 엄마가 자식을 버리겠냐고… 회유하던 엄마와 동생은 끝내 윤경이 마음을 바꾸지 않자 화를 참지 못하고 뺨을 올려치고 집의 온 가구들을 부수며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게 차라리 마음이 편하지. 끝은 이래야지… 생각하며 윤경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끊임없는 욕설도, 뭔가 부서지는 소리도 점점 들리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낯선 하얀 천장이 보였다. 방금 누군가를 만나 중요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깜박이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보았다.  자신이 일어나는 소리에 벽에 기대어 졸고 있던 기환이  번쩍 일어나더니 윤경을 꼭 안았다. 곧이어 의료진이 들어오고 윤경은 자신이 일주일 넘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검사를 받고 기획사에서 온 직원들과 처리에 대해 논의하고 마침내 다시 조용한 병실에 기환과 윤경 둘만 남게 되었다. 기환은 침대에 기대앉은 윤경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 같아서.. 많이 망설였어.”


“응?”


“윤경아, 내가 네 가족이 되어줄게. 우리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자. 세상에 너 혼자라는 생각 절대 들지 않게  할게”


기환은  일어나 바닥에 한쪽무릎을 기대고 윗도리에서 반지를 꺼내 윤경에게 내밀었다.


“나와 결혼해 줄래?”


윤경의 눈에서 맑은 물이 톡 떨어졌다. 떨리는 손을 내밀어 기환이 내민 반지를 받았다. 


“사랑해, 윤경아.”


“사랑해, 기환 씨"


 기환은 윤경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가냘픈 어깨를 감싸 안았다. 기환의 품에 안긴 윤경의 얼굴에 파란빛이 반짝이다 사라졌다.


“AS가 된 건가요, 삼신님?”


논은 화면 속의 윤경의 얼굴 위에 나타난 파란빛을 보고 의아함에 삼신을 바라봤다.

삼신은 논을 뒤로 한채 꽃밭에서 가져온 떨어진 꽃잎들을 햇살이 잘 드는 창가 쪽에 곱게 하나씩 펴고 있었다.


“파란빛을 봤나요?”


“네…그런데 아무리 봐도 뭐가 AS인지 모르겠어요.”


삼신은 꽃잎들을 가지런히 편다음 뒤를 돌아보았다. 


“이 꽃잎들은 각 영혼이 꽃이 환생을 위해 휴식을 취하며  남는 에너지들 이랍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전생에 상처를 받은 에너지를 이 꽃잎으로 떨어내지요. 어쩌면 그들에겐 독이었을 그 에너지가 이렇게 햇살에 말리면 그 무엇보다도 좋은  비료가 되어 새로운 영혼의 꽃들이 피어나는데 도움이 되지요. 환생국의 AS도 결국 그런 거랍니다. 저희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다만 흐름을 살짝 바꿀 수 있지요.”


논은 삼신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삼신은 미소를 짓더니  허공에서 티팟을 꺼내고 창가에 미리 말려둔 꽃잎 몇 개를 넣고 논의  앞에 와 앉았다.


“작은 도움을 주는 거랍니다. 결국 점지는 가족이야기지요. 천륜. 하늘에서 맺어준 인연. 그런데 그것으로 고통받는 영혼님을 위해 그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는 권한이 저희에겐 없습니다. 다만 그 고통의 원인을 잊게끔 살짝 도와줄 수 있죠. 환생국의 가장 큰 힘 점지로요. 그리고 영혼 본인이 이끈 흐름으로 새로운 변화가 오는 거죠.”


말을 마친 삼신은 티팟을 열어 논에게 내밀었다. 티팟 안에는 꽃잎이 대여섯 개 있을 뿐인데 매우 진한 향기를 내뿜었다. 어쩜 이렇게 진한 향이 날까 하고 티팟 안을 더 자세히 보니 꽃잎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티팟 안의 차가 허공으로 부드럽게 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기둥 위에 윤경의 모습이 보였다. 아기를 안고 있는 행복한 모습의 윤경과 기환, 그리고 그 뒤에 그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노부부가 보였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논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 물이 티팟 안으로 모두 들어왔다. 삼신은 티팟 뚜껑을 닫고 논과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마셔봐요. 달콤한 행복 꽃차랍니다.”


삼신의 말대로 차에선 달콤한 향기가 가득했다. 차를 한 모금 넘기자 달달한 향내가 온몸을 가득 채웠다.

찻잔을 내려놓고 논은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제가 본건 미래인가요? 영혼 15423번 님이 결혼을 한 후 그 아이를 저희가 점지하는 게 저희 AS인가요? 그 옆에 계신 노부부는 누구지요? 그것도 AS인가요?”


삼신은 논의 쏟아지는 질문에 미소를 띠더니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내려놓았다.


“미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인간은 언제든 신이 정해둔 길쯤 자기들의 의지로 바꿔버릴 수 있는 자들이니까요. 

영혼 15423번 님의 짝은 전생에서 매우 높은 점수로 점지를 받고 환생한 영혼입니다. 지금도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있고요. 이런 자를 짝으로 만난 건 영혼 15423님의 흐름이지요. 

그리고 인간들은… 정말 신이 알 수 없는 의지로 인연을 스스로 만들어 간답니다. 저 노부부는 현재 남자 인간의 부모입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도 눈에 띌 만큼 선행을 쌓은 자들인데… 이들은 15423번 님의 첫 번째 삶에서 부모였답니다. 

영혼 15423번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을 것입니다.”


논은 삼신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인간의 인연은 어디까지 이어나가는 것일까. 

자신에게 시간을 주는 듯 조용히 차를 마시는 삼신을 보며 논은 자신이 책상 위에 둔 쪼개진 씨앗을 생각했다. 자신이 퍼부은 화로 인해 이미 지운 전생을 기억해 내 빛을 잃고 깨져버린 영혼의 씨앗… 그 씨앗도… 자신이 아니었다면 새롭게 환생에 인생을 살 것인데… 이미 재판을 받은 영혼을 자신이 심판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 영혼의 삶에 자신이 끼어든 것도 흐름의 일환일까?... 그렇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지 않을까… 논은 자신의 마음속 가득 찬 이 답답함이 흐름 속에 해결되기를 바라며 입안 가득한 달큼한 차를 꿀꺽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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