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기억

라만차의 바람과 나의 무뎌진 감정에 대하여

by 쥬드

프롤로그

패닉의 〈로시난테〉를 들으며 마드리드 공항에 내렸다.
라만차의 풍차로 가자는 노랫말은 현실의 풍경보다 한 걸음 늦게 다가왔다.

공항의 색채는 인천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벽이 아니라 공기 자체가 다채롭게 물들어 있는 듯했다.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스페인은 ‘질서의 나라’가 아니라 ‘색채의 나라’라는 것을.

사람들은 각자의 빛깔로 걸었고, 바람은 각자의 리듬으로 불었다.
그 다양함 속에서 나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I. 마드리드의 첫인상, 비어 있는 풍경

호텔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밤이 되자 창밖으로 거대한 유리 건물들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은행과 보험회사의 사무실이었다. 사람은 없는데 불은 꺼지지 않았다.

비어 있는 책상 위로 모니터 불빛만 형형히 남아 있었다.
파티션도, 개인 자리도 없는 완전한 개방형 공간.
모두가 함께 일하고, 아무도 서로를 구분하지 않는 곳.

효율적으로 보였지만 이상하게 불편했다.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서양에서 칸막이를 없애다니. 세상은 참 아이러니하다.”

만약 저곳에서 일한다면, 퇴근 후에도 보이지 않는 시선이 내 어깨에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II. 출근길의 사람들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산책을 했다. 거리는 조용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걸었다.
그중에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회사로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회사란 결국 또 하나의 가정일지도 모른다고.

마드리드는 생각보다 관광의 도시가 아니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장, 프라도 미술관, 구시가지를 벗어나면
시선이 머무는 곳은 현지인의 삶 그 자체였다.

그래서일까.
관광객의 눈이 아니라 생활인의 눈이 생겼고, 내 시선은 도시의 일상, 그리고 그 바깥으로 향했다.


III. 풍차의 마을, 바람의 나라

버스는 라만차의 평야를 가로질렀다. 창밖은 황량했다. 초록빛 대신 짙은 흙빛이 지평선을 덮고 있었다.

낮은 키의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가 세찬 바람에 일제히 흔들렸다. 이곳에서는 바람이 나무보다 오래 사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멀리 풍차가 보였다. 멈춰버린 시간의 잔상 같았다. 날개는 돌지 않았고, 대신 사람들의 카메라만 쉼 없이 움직였다.

나는 풍차의 그림자를 밟으며 멈춘 날개를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인정사정없이 머리를 흩날렸다.

그 순간, 내 안의 멈춰버린 무언가가 떠올랐다.

기능을 잃은 풍차처럼, 나도 어쩌면 한때 뜨거웠던 열정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IV. 톨레도 — 과거의 시간 속에서

톨레도는 거대한 회색 성곽의 도시였다. 성당 앞을 지나던 중, 우연히 결혼식을 보았다.
눈부신 드레스, 격식 있는 정장, 그리고 대기 중인 롤스로이스.

그 장면이 이상하게 생생했다. 이곳이 박제된 관광지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도시임을 증명하듯.

하객들의 옷차림은 우리보다 훨씬 정중했다. 정장은 단정했고, 드레스는 우아했다. 느린 시간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사람들. 그 느림이 도시의 공기를 한층 더 깊게 가라앉혔다.

V. 빌바오 — 은빛의 도시

북부 빌바오로 향하는 길은 길고 고요했다. 엉덩이가 아파질 즈음, 도시가 나타났다. 작고 정돈된 거리, 여유로운 얼굴들.

구겐하임 미술관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다. 티타늄으로 감싼 거대한 곡선은 마치 생명체처럼 숨 쉬는 듯했다. 그러나 전시장에 들어가자, 예술은 나를 조금 밀어냈다. 그림은 화려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이 묘하게 비워졌다. 이해되지 않는 것도 결국 하나의 감정이지 않을까..

VI. 바르셀로나 — 빛과 사람의 도시

8년 만에 다시 찾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완성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첨탑 위로 천사들이 오르고, 스테인드글라스는 여전히 현기증 날 만큼 화려했다.

그런데 놀라지 않았다. 감탄 대신 익숙함이 자리를 메웠다.

나를 바꾼 것이 시간인지, 성당의 변화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익숙함이 조금 서글펐다.

밤의 바르셀로나는 뜨거웠다.

거리마다 맥주잔이 부딪히고, 사람들은 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웃음 속에서 문득 생각했다.

아주 젊을 때 이곳에 왔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VII. 바르셀로나의 근교

몬세라트의 절벽 위 성당, 지로나의 중세 거리. 어디를 가도 돌길과 고성, 오래된 종탑이 있었다.

아름다웠지만 감흥은 겹겹이 쌓이지 않고 옅어졌다.
아마 내가 변한 것이다.

나이가 들며 감정의 결이 사포로 문지른 듯 조금씩 닳아가는 법이니까.

VIII. 스페인의 짠맛

스페인의 음식은 한마디로 짰다. 하몽, 빠에야, 심지어 스프까지.

재료 본연의 맛을 남기려는 단순한 방식이지만 우리 입에는 조금 버거웠다.

그래도 단체 여행 덕에 혼자였다면 들어가지 못했을 법한 오래된 식당들을 경험했다. 그 점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식당마다 한국인 단체 손님이 가득한 걸 보며 잠깐 이런 생각이 스쳤다.
‘혹시 가이드와의 은밀한 커넥션?’

그런 소심한 의심조차, 여행의 작은 재미였다.

IX. 황량한 들판을 지나며

사라고사를 지나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에는 끝없는 들판이 다시 펼쳐졌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불었다. 그 꾸준한 바람에 묘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새로운 것을 보는 일이 아니라, 잊어버린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 ‘나’는 예전 같지 않았다.

첫 방문의 설렘은 사라지고, 감정은 조용히 침잠해 있었다.

세월은 우리를 다르게 만든다.
풍차의 날개가 멈춘 것처럼, 내 감정도 사방으로 반응하지 않고 어느새 한쪽으로 무뎌져 있었다.

에필로그 — 바람의 기억

여행의 마지막 날, 마드리드 공항에서 〈로시난테〉를 다시 들었다.

“라만차의 풍차를 향해 달리자.” 그 노랫말은 여행 전과는 다른 무게로 마음에 걸렸다.

늙은 돈키호테의 무모한 돌진을 떠올리며, 그 상상 속에서 지금의 나를 비춰보았다.

거친 바람에 나도 늙었구나. 그리고 무뎌졌구나.

하지만 그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감정이 무뎌지는 만큼, 세상을 조금 더 조용히, 그리고 깊게 바라보게 되니까.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다.

그 바람 속에서 생각했다.

“여행이 끝나도, 나의 마음 한켠엔 여전히 스페인의 바람이 남겠구나.”


돌아와서도 한동안 스페인의 황량한 바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언가를 ‘본다’는 일은, 어쩌면 내 안의 어떤 조각을 다시 ‘깨우는’ 일인지 모른다.

그 조각이 오래된 풍차의 날개처럼 느리게 돌아간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나를 앞으로 밀어주는 바람이다.

나는 그 바람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 한다.

비록 지금의 나는 조금 늙고, 조금 무뎌졌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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