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내 삶에 들어온 순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고

by 쥬드

대학교 2학년 때 들었던 미학 수업은 내 대학생활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수업으로 남아 있다.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그 수업을 통해 미술의 역사와 미학, 작품을 바라보는 방법, 숨은 상징과 시대의 맥락을 처음 배웠다. 그전까지 그림은 ‘아는 사람만 아는 세계’ 같았는데, 수업 이후로 그림은 내 삶 가까이로 들어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미술이 내 삶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그 기억을 조용히 되살려준 책이다. 작가는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실 속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일하며 그림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이 책이 좋았던 건 치유를 거창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실은 사라지지 않지만, 예술은 그 상실을 끌어안고 살아갈 힘을 조금씩 만들어준다. 그 담담한 회복의 과정에, 나 역시 대학 시절 흔들리던 마음을 미학 수업이 붙잡아 주던 장면이 겹쳐 보였다.


미학 수업에서 내가 특히 강하게 기억하는 작품은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들」이었다.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신화나 낭만주의적 아름다움이 유행하던 시대에 쿠르베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렸다. 나는 그 태도에 오래 머물렀다. 20대의 나는 현실이 싫었고 미래가 불안했으며,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불만도 많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그 그림은 내게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일기장엔 ‘리얼리스트로 살자’ 같은 문장들이 가득했다. 지금 보면 조금 오글거리지만, 그만큼 절박했던 마음의 증거이며 청춘의 고민이기도 했다.

Gustave_Courbet_-_The_Stonebreakers_-_WGA05457.jpg

이 그림을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르셰 미술관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내가 좋아하던 쿠르베를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파리 오르셰를 찾았을 때, 입장 순간의 냄새와 습도, 조명과 공간의 울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차역을 개조한 오르셰는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고, 인상주의와 사실주의의 작품들이 가득한 그 공간에서 나는 “그림을 보는 일”이 곧 “삶을 정리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가면 그 도시의 미술관을 꼭 찾게 된 게.


작년에는 노르웨이 뭉크 미술관에서 「절규」의 여러 버전을 마주했다. 같은 주제라도 매체와 색, 질감에 따라 온도가 달랐고, 그 차이를 바라보는 동안 내 불안도 조금씩 형태를 얻는 느낌이었다. 불안은 이름이 없을 때 더 커지는데, 그림은 그 불안을 화면 위에 붙잡아 둔다. 올해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서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봤다. 피하고 싶을 만큼 강렬한 작품이었지만, 그 강렬함 때문에 오히려 ‘외면하지 않는 시선’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했다. 쿠르베가 현실을 정면으로 그렸다면, 고야는 인간 내면의 어둠까지 정면으로 들이민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인상도 결국 그 결에 닿아 있다. 미술관은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을 잠시 올려두는 선반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경비원이라는 자리에서 작품을 지키고 사람을 지키고 시간을 지키는 일을 하며, 결국 자기 마음을 지키는 법을 배워간다. 그리고 그 과정은 내게도 이어져 있다. 같은 그림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기 때문에, 매번 다른 말을 걸어온다. 미술관은 늘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매번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하는 장소다.


책을 덮고 나니 다시 미술관에 가고 싶어졌다.

특별한 감동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삶이 조금 거칠어질 때마다 마음의 호흡을 고르기 위해서.

그러니까, 아주 사소한 이유로. 언젠가 또 어떤 그림 앞에서, 나는 조용한 영감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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