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2

by 글씨가안엉망

어떠한가 공동체의 연대는 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을 위해서는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 권력은 더 이상 왕이 처벌하고

억압하는 가시적 권력의 형태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근대의 권력은 금지하고 억압하기보다 생산하고 조직하며

관리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이러한 현상을 진화라고 표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딱히 적합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으므로

진화라는 단어를 빌어 표현하기로 한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한계와 가치를 규정하여

그것을 다시 관리대상으로 인식하는 방식으로의 진화를 말한다.


그는 이를 ‘통치성(governmentality)’이라 불렀다.


통치성은 단지 국가가 국민을 다스리는 기술이 아니다.

통치의 전제조건은 대상이 있어야 하며,

그 대상의 따름 또는 복종을 전제로 한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다스리도록 만드는 합리성이다.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라

하나의 통치 합리성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장 논리를 인간 존재의 형식으로 일반화한다.


국가는 물러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개인을 시장의 주체로 재구성하며

당연한 존재의 방식으로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존재의 방식은 거부할 수 있고

거부할 수 없고의 문제로 볼 수는 없다.

거부는 곧 재구성을 의미하며 또 다른 시장논리가 만들어진 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가 말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단순히

경제적 가치를 가진 재화를 교환하는 인간이 아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자본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능력, 시간, 관계, 감정까지 투자의 대상이자

수익의 원천으로 계산하는 존재다.


여기서 권력은 더 이상 외부에서 강제하지 않는다.

어차피 자기 자신의 의지로 결론지어진 개념이기 때문에

어쩌면 신자유주의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는 개념일 수도 있다.

개인은 스스로를 관리하고, 스스로를 최적화하며

스스로를 경쟁에 내던진다.

억압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면화되고 당연시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삶의 전 과정을 산출가능한 경제적 장으로 인식시킨다.

삶은 더 이상 살아내고,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경영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저항이 어려운 이유는 분명하다.

권력은 더 이상 나를 억누르는 외부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체제에 저항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구축해온

정체성, 자기계발, 성취, 노력의 서사를 의심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저항은 외부로 향하지 못하고 내부로 침잠한다.


신자유주의의 부정은 곧 자기가치의 부정이 되기 때문에

논리적인 충돌이 생기게 되며,

사회적 실패는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관리의 실패로 번역된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실업은 능력 부족이 되고,

우울은 개인의 취약성이 되며, 번아웃은 열정의 부족으로 재해석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생각해보면 부정하지만은 못 할 것같다.

나조차도 번아웃을 애써 거부하며

조직의 생산성에 기여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존재이니..


이때 권력은 가장 안정적인 상태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통치는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푸코가 말했듯, 가장 효과적인 권력은

저항을 제거하는 권력이 아니라

저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권력이다.

신자유주의의 안정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폭력적이기보다 합리적이며 강제적이기보다 자발적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연대의 붕괴는

도덕적 타락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성의 성공이다.

각자는 기업가로 호명되고 각자의 삶은 프로젝트가 된다.
프로젝트는 협력이 아니라 경쟁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연대는 곧 산출된 손해이며 위험이으로 인식하게 된다.

왜냐하면 타인의 실패는 나의 투자 환경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대는 불가능한가.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도 있다고 말했다.

권력이 관계라면 저항 또한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저항은 어쩌면 자기 이해의 방식을 바꾸는데서 시작될 수 있다.

나는 단지 나의 성과가 아니라 하나의 관계적 존재라는 인식.

나의 실패가 오로지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자각.

통치성에 맞선다는 것은 국가와 싸우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이해하는 방식을 재구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대는 동일성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공통의 조건 속에 놓여 있음을 인식할 때

비로소 정치가 다시 시작된다.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고립시키지 않았다.

우리를 고립된 존재로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그 이해가 균열을 일으킬 때 쯤이면 연대의 의미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1. 참조 및 인용

-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한병철, 2024.1.2 / 김영사)

이전 14화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