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속에서 나를 키운 시간들

공포 속에서 자란 나는 매일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다

by 주방 이모



우리 집은 땅 한 평, 집 한 칸 없이 남의 집 문간방에 얹혀사는, 말 그대로 찌질이 가난한 집이었다.

2남 3녀 중 막내였던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큰오빠와 큰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무 가난해 자식들을 굶겨 죽일까 걱정했던 엄마는, 어린 자식들을 남의 집에 맡겨야 했다고 한다.


언니는 일곱 살에 서울로 가정부 일을 하러 떠났단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떤 고생을 했을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던 우리라고 해서 사정이 나았던 건 아니다. 생활력 없고 고지식했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엄마와 자식들을 향해 폭언과 구타를 퍼부었다. 술에 취한 날이면 집 안은 전쟁터였고, 우리는 숨죽인 채 그날의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하기 싫었지만, 가족의 안정을 위해 내가 먼저 아버지 앞에 나서야 했다. 밤새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훈계와 매질을 견뎌야 했고, 조금이라도 비위를 거슬리면 쫓겨나 남의 집 헛간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려 몰래 집에 들어와 이불속으로 숨어들던 그때의 공포는 지금도 생생하다.


배고픔도 일상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잣집 아기를 봐주는 일로 동생과 함께 허기를 달랬다. 매일 죽만 먹는다고 투정 부리던 오빠의 말에도, 엄마는 쌀이 없어 그나마 죽이라도 끓여 아이들 배를 채워주려 애썼다. 그때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미안했을까. 지금 와서, 가난한 부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코끝이 시릴 만큼 짠하다.


그런 환경에서도 나는 공부 욕심이 많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공부만이 지옥 같은 집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엄마를 설득해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남이 입던 낡은 교복을 얻어 입고 학교에 가던 첫날, 그 설렘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해서 뭐 하냐”며 초등학교까지만 다니고 돈 벌어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유치원 교사가 꿈이었고, 중학교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마치 교사가 된 듯 가슴이 벅찼다.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 면제를 받기 위해 배구부에 들어갔다. 매일 땀 흘려 운동하고, 수업을 듣고, 꿈을 키워가던 어느 날. 배구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동생이 울며 말했다.

“아버지 팔이 다쳐서 서울 병원에 가셨어.”

벼를 터는 기계에 팔이 말려 들어갔다는 이야기였다.


그날은 내 인생이 바뀐 날이었다.


간신히 다니던 학교였지만, 아버지의 사고로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나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엄마가 나 때문에 더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서울로 돈을 벌러 가자. 내 나이, 고작 열네 살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내 1년 치 월급을 선불로 받아갔다.

나는 그저 ‘팔려가는 아이’였다. 그렇게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에게 지금 말해주고 싶다.

“넌 정말 잘 해냈어. 그리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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