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학교15 ] 겨울 끝자락의 붕어빵

이 길도 있다

by 주방이모 정혜원


겨울 끝자락의 붕어빵


"이 길도 있다"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두바이 붕어빵


겨울 길거리에서 빠질 수 없는 음식이 있다. 바로 붕어빵이다. 나는 팥을 좋아해서 붕어빵을 먹을 때면 늘 팥붕어빵을 고른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붕어빵 포장마차에는 연륜이 느껴지는 사장님들이 많았는데, 유독 2025년 겨울에는 젊은 사장님들이 많이 보였다.


며칠 전 역 앞을 지나가다 붕어빵 포장마차를 발견했다. 겨울도 끝나가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먹어볼까. 그렇게 가볍게 들른 곳이 젊은 여성 사장님이 운영하는 붕어빵 가게였다.


메뉴를 보다가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두바이 붕어빵.' 처음 보는 메뉴였다.


"두바이 붕어빵이 뭐예요?"


"피스타치오 크림 넣은 거예요. 요즘 SNS에서 유행하는 거."


신기해서 하나 주문했다. 따뜻한 붕어빵을 손에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마지막 장사


붕어빵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사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날씨가 너무 따뜻해져서 오늘이 마지막 장사예요. 붕어빵은 겨울만 되니까요."


"그럼 다른 계절엔 뭐 하세요?"


"그게...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사장님의 목소리에 불안함이 묻어났다. 겨울 장사는 끝나는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예전에 고깃집을 운영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10년 넘게 일하다가 지금은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장님이 눈을 반짝였다.


"어떤 일 하세요? 어떻게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어요?"


질문이 쏟아졌다. 붕어빵을 굽다 말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쓰였다.


14살, 서울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내가 14살에 서울에 올라와 세상살이를 시작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누군가 옆에서 "이런 길도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가난의 굴레를 조금 더 빨리 끊을 수 있었을까. 조금은 덜 헤매며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부딪히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길 반복했다. 40년 넘게 그렇게 살았다.


붕어빵 사장님을 보니 그때의 내가 보였다. 앞이 막막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그저 당장 눈앞의 생계만 걱정하던 그때.


조금 먼저 살았을 뿐


나는 사장님에게 말했다.

''저도 많이 헤맸어요. 그냥 조금 먼저 살았을 뿐이에요. 제가 걸어온 길을 말씀드릴 수는 있어요. 하지만 선택은 사장님 몫이에요."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돼요.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나아요."


붕어빵을 다 먹고 자리를 뜰 때쯤 사장님이 말했다.


"다음 주에 시간 되시면 한 번 더 와주실 수 있어요? 좀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다음 주, 그 자리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다시 그 자리에 가기로 했다. 붕어빵을 먹으러 가는 건지, 이야기를 나누러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겨울의 마지막 붕어빵을 먹으며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이 길도 있다"라고 말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40년을 혼자 헤매며 배운 것들을 이제는 조금씩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나한테 주어진 다음 일인지도 모르겠다.


다음 주에 다시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번엔 커피나 한잔하면서.


그것이 제가 65살에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