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말과 생각이 돌아오는 곳

스승들이 남겨둔 언어 너머의 것

by 잔하비

마까란다를 번역하다 보면 종종,

언어의 벽과 사고의 벽 앞에 멈춰 서 있는 아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너머를 봐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를 마주하게 된다.

초반에는 번역을 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지점에 이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만뜨라 찬팅 가운데에서도 음률과 발음의 정확성을 엄격히 요구하는 베딕 찬팅이

혹시 언어의 한계를 넘어 다른 차원으로 건너가게 하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딕 찬팅은 뜻의 이해 이전에 소리가 먼저 작동한다.


인도 요가대학교 대학원S-VYASA에서도 의미나 해설을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그저 듣고 따라 하라는 지도가 전부였다.

모국어를 기준으로 듣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발음, 잘못 들은 소리를 바로잡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타인의 소리를 듣고, 동시에 나의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여는 일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은 오랫동안 몸에 배어 있던 습관이 하나씩 변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찬팅은 언어가 아니었다.

그 언어는 사고의 도구가 아니었다.

의식에 작용하는 진동 자체를 다루는 수련이었다.

의미를 아는지는 필수 조건이 아니었다. 소리가 전부였다.

‘무언가 알고 하자’라는 동기부여나 확신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의식은 그저 소리와 호흡에 머물렀다.

쉼표가 찍힌 곳에서 숨을 쉬며,

한 호흡 안에서 적절한 속도로 찬팅 하는 과정은 수많은 반복과 연습을 필요로 했다.

그런 연습 속에서,

판단하거나 계산하기 이전의 상태, 사고가 중심이 되기 전의 어떤 지점에 잠시 머무는 듯했다.

그곳이 말과 생각이 돌아가야 할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마까란다는 읽어서 이해되는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그것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며 수행했던 사람들이 남긴 언어의 유적, 혹은 흔적에 가까운 것 같다.

그들이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분석하기보다 그들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를 살피는 과정이었다.

소리에 집중하고, 내가 살아온 나라와 역사, 문화가 덧입혀진 언어의 벽의 색깔이 옅어질 때,

오히려 그 벽에 갇혀 있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때로는 멍해지기도 한다.


찬팅 역시 언어라고 생각해 왔지만,

소리의 발성과 진동을 다루는 수련을 통해

내가 지닌 언어와 사고의 한계를 조금씩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이 언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단지 언어만은 아니었고,

그 너머의 것들이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어쩌면 스승들이 이 책을 남겨 둔 이유는

우리가 해석하고 습득해야 할 숙제로 남겨두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으나 잊고 있던 것들,

가장 깊은 곳에서 그들과 함께 흐르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두꺼운 안갯속에 들어가면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아주 명확하게가 아니라,

희끄무레하게.

그러다 흐릿함이 걷히고

어떤 것들이 서서히 선명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깨어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요즘 저는 ‘요가 마까란다’와 함께

조심스럽게 그 의미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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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딕 찬팅Vedic Chantin: 베다 경전을 일정한 음가와 억양에 맞추어 소리로 전하는 전통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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