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을 굴렸다.
이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페리 위, 나는 지중해의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새미, 나중에 내가 코르시카에 또 올 수 있을까?”
“그럼, 당연하지.다음엔 터키쪽에서 들어올 수도 있어.”
마음만 먹으면 금세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그들의 지리적 조건, 그리고 그런 삶에 익숙한 사고방식이 부러웠다.
하지만 집으로 향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스위스 어딘가, 이름도 모를 도시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출발할 때부터 마쿠스의 컨디션은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차 안에서 구토를 하고 복통을 호소하더니, 이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는 더는 못 버티겠다고 말했다.
차를 멈추고 급히 병원을 찾아 들어갔다. 진단은 신장결석. 긴 여행 끝에 몸이 긴장을 놓아버린 탓이었을까.
몇 시간에 걸친 진료 끝에 겨우 통증만 가라앉힌 뒤,
본격적인 치료는 독일에 돌아가 받기로 했다.
새미가 혼자 운전대를 잡았고, 졸음쉼터에 들러 가며 눈을 붙이며 우리는 이틀에 걸쳐 독일로 돌아왔다.
오페어를 마치고 복학한 뒤, 한 교수님의 수업에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학생운동으로 수감된 경험이 있다는교수님이 말했다.
“여러분, 그때 뭐가 제일 힘들었는지 아세요? 삼일 동안 양치를 못 한 게 그렇게 괴로울 줄은 몰랐어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에서 쭈그려 몇 시간을 버티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틀간 양치질을 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평소 깔끔을 유난히 따지는 사람도 아닌데도 말이다.
마쿠스는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실로 향했고, 며칠간 병원 신세를 졌다. 수척해진 얼굴로 퇴원하던 날,
그가 내게 말했다.
“호빵, 나 이제 코르시카는 못 갈 것 같아.”
나도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다시 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코르시카를 뒤로하고,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매일 떨어져 있는 돌을 언덕 위로 굴리는 것만 같은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여행의 고단함은 사라졌지만, 그 여정을 함께 견뎌낸 시간은 새미네 가족과 나를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게 묶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