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귤껍질을 벗기며

by 김혜련

귤껍질을 벗기며


김혜련


겨울밤의 긴 팔에 안겨

귤껍질을 벗기는 재미에

무겁던 어깨조차 들썩거린다


어린 시절 난생처음 귤을 맛보던 순간

그때 그 뛰어오르던 감동이 되살아나

주름진 눈가조차 설렌다


문밖에는 잠들지 못한 겨울바람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지만

나는 지금 귤껍질을 벗기며 손가락이 은행잎처럼

곱게 물드는 모습에 콧노래가 절로 흐른다


내가 지금 이 겨울밤에 잠자리에 들지 않고

오래오래 귤껍질을 벗기고 있는 것은

올 한 해 내 어깨를 짓누르던 온갖 고뇌와 고통의

껍질을 벗겨내는 나만의 의식을 수행 중인 것이다


귤껍질 한 알을 벗기면서

모질게 곪은 상처를 씻어내기도 하고

잠 못 이루던 흙빛 고뇌를 털어내기도 하고

달콤한 추억에 입 맞추기도 하며

한 해를 갈무리하는 것이다


겨울밤의 긴 머리카락을 헤아리며

귤껍질을 벗기는 즐거움에

무겁던 종아리조차 살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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