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배롱나무

by 김혜련

배롱나무


김혜련


고드름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겨울이라는 긴 시간의 혈관에도

수수팥떡 같은 혈전이 쌓이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한사코 잠을 쫓아내는

이 황량한 겨울에 나는

방안에 틀어박혀 웅크리고 산다


창밖에 서너 줌의 눈발이 날리고

까치가 언 목을 풀고 노래할 때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오래 방치한 음식물쓰레기를

오늘은 기필코 버려야 한다는 핑계를

끄적거리며 오랜만에 문밖을 나선다


지난여름처럼 내 발길은

자연스럽게 순천만국가정원으로 향했고

테라피가든 앞에서 만난 그들은 모두

생을 갈아 넣은 한 해의 시간을

훌훌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서 있다


병약한 나보다 추위를 잘 타는 그들이

두꺼운 니트 조끼에 구스다운 롱패딩까지 겹쳐 입은

내 손을 붙잡고 눈꺼풀조차 후루루 후루루 떨고 있다


심약한 나 속으로 눈물을 참고

꽁꽁 언 그들의 손을 쓰다듬으며

이 엄동설한에 왜 무모한

알몸시위를 하느냐고 쏘아붙이자

백반증 걸린 등짝을 까 보이며

추워 얼어 죽는 한이 있어도 벌거벗은 상태로

상처 딱지가 곱게 떨어져야

내년 여름 붉은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비극적 운명을 내 귀에 대고 들려준다


그 아린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이 긴 겨울 내내 떨고 있을 그들을

도저히 그냥 내버려두고 올 수 없어

방금 전까지 내 목을 감쌌던 털목도리를 풀어

아무도 몰래 둘러주고 줄행랑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