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면서 2인용 식탁을 샀다. 전세로 얻은 작은 신혼집 주방에 알맞게 들어가는 사이즈였다. 둘이서 쓰기 좋게 단란한 분위기가 났다. 겉면을 매끈하게 다듬은 다갈색 원목으로 굳고 단단해 10년을 넘게 써도 끄떡없었다. 아이들이 태어나 4인 가족이 된 후에도 2인용 식탁을 계속 썼다. 식탁이 멀쩡하기도 했지만 새로 장만할 여유가 없었다.
2년 전 여섯 번째 이사를 하면서 15년 만에 식탁을 새로 샀다. 이사한 집 주방은 4인용 식탁을 넣기에 걸맞은 크기였지만 조금 무리를 했다. 2인용 식탁을 15년 쓴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새로 장만하는 식탁은 30년은 쓸듯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없던 식탁 욕심이 났다.
새 식탁은 높이 750mm, 가로 1800mm, 세로 800mm인 6인용 식탁이다. 상앗빛 무광 세라믹 상판에 물푸레나무 원목 다리가 사선으로 뻗어있는 꾸밈없고 실용적인 디자인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바탕에 불규칙한 패턴을 은은하게 살린 표면이 도화지 같다.
식탁 욕심이라 했지만 실은 책상 욕심이다. 책상이 없는 삶을 상상해본 적 없건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책상자리를 차례로 양보했다. 10년 전 딸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방을 혼자 쓰고 싶다고 선언해 책상과 침대를 따로 넣어줬다. 나의 서재 방이 딸 방으로 바뀌었다. 내 책들은 거실에 장을 짜서 세 겹으로 채워 넣었다. 아들도 학교에 가면서 남편의 컴퓨터방을 없애고 아들 방을 만들어줬다.
요즘은 둘 다 가끔 방문을 닫는다. 사춘기가 되면 혼자 있을 장소가 필요하다. 자녀들에게 자기만의 방이 생기면서 부모 각자의 공간이 사라지고 같이 쓰는 데만 남았다. 방 두 개를 아이들 주고 나니 남은 안방과 거실 어디에도 딱히 책상을 놓을만한 곳이 없다. 내 책상의 부재를 오랫동안 감수하고 지냈다. 식탁이라도 책상으로 쓰겠다는 야심이 불탔다.
책상은 클수록 좋았다. 책을 여러 권 펼쳐 놓고 읽는 편인데다가 만년필과 잉크를 꺼내 필사도하고 노트북 키보드까지 두드리는 나에게는 큰 책상이 필요했다. 가족은 네 명이지만 6인용 식탁을 골랐다. 주방을 지날 때마다 통로가 좁아 불편하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빈 도화지에 무엇을 그릴까 설렜다.
식탁과 글쓰기를 조합한 신조어도 있다. 브런치 작가라던가 키친 테이블 라이팅이라던가. 전업 작가가 아닌 사람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부엌 식탁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일과가 밤 열시가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족들이 모두 잠에 들어야 주부의 일과가 끝난다. 결혼이라는 선택에 숨은 옵션같이 들어있던,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아도 집이라는 조건이 존재하는 한,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맡아야 하는 가정주부의 삶이다.
결혼 이전의 삶에선 없던 역할을 오늘도 해보려고 애를 쓴다. 식탁을 책상으로 퉁치려 했건만 식탁은 식탁이고 책상은 책상이다. 식탁을 매번 새로 치워야하니 책 읽기도 글쓰기도 연속성이 깨어진다. 연속성도 깨어지지만 편의성도 떨어진다. 식탁은 책상보다 높이가 낮아 장시간 작업을 하면 목이 아파온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어깨와 허리, 목에 부담이 오고 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내 책상을 되찾아야 함을 느낀다.
하루에 몇 번씩 용도를 변경하며 식탁을 치운다. 책상도 되었다가 식탁도 되었다가 먼지가 앉을 겨를 없다. 조금은 사적인 공간을 꿈꾸었지만 결국은 공용 공간이다. 남편도 나도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집에서 그럴만한 자리가 없다. 아이들은 방문을 닫고 들어가면 되지만 우리는 닫을 문이 없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항상 열려 있어야 하니까.
6인용 식탁이 있는 것만으로 많은 꿈을 꾸게 된다. 서점 매대처럼 새로 산 책들을 눕혀 진열해 놓고 흡족해하는 장면도 떠올려봤다. 이웃을 초대해 차도 마시고 각자 1인분의 음식을 자유롭게 가져와 다양하게 나눠먹는 포틀럭 파티도 열고 싶다. 여섯 명이 모여 책모임을 할 수도 있다. 4인 가족의 자리에 2인 자리가 더해지면서 빈자리만큼 상상의 여지가 늘어났다. 가족 외의 관계를 더해 보는 상상이 즐겁다. 두 사람의 몫이 더해지면서 색다른 경험으로 초대하는 문도 함께 열린 기분이다.
시작은 6인용 식탁이지만 버지니아 울프처럼 적어도 책상 여섯 개는 갖고 싶은 바람이 있다. 꿈을 클수록 좋다고 하지 않는가. 여섯 개의 책상 정도는 욕심내야 한 개라도 생길 것 같다. 공간만큼 경험이 더해진다. 식탁이 시작이듯 책상도 시작이다. 즐거운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힘도 그곳에서 자라나길 바란다. 세상이 나에게 허락하는 자리는 얼만큼일까. 지금은 하나도 없지만 가능한 넓게 차지하고 싶다. 굳은 몸을 펼치며 기지개를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