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바다에 대해서
-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헤밍웨이는 그의 소설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에서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란 말을 했다. 이 말은 어떤 경우에 한 사람의 삶에 강렬한 임팩트를 줄 수 있는 문장이다. 나는 코로나가 창궐한 2020년에 고흥의 바닷가를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검푸른 바다에는 큰 파도가 치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하염없이 비가 내리면서 파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나는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란 이 문장이 갑자기 생각나면서 감회에 젖어 버렸다. 아마 당시 내 처지에 맞는 어떤 감흥이 나를 이끈 것 같다. 사실 그때는 이 말이 헤밍웨이의 말이라는 것도 몰랐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 문장이 내 뇌 속 어디 깊은 서랍에서 떠돌다가 빗방울이 파도 위에 부서져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떠오른 것이리라. 아마 코로나라는 강력한 비가 내려서 온 세상을 다 덮더라도 바다 같은 내 삶은 결코 영향을 받지 않고, 잠식되지 않을 것이다란 그 어떤 비장함이 나의 마음속에 일어났던 것 같다.
그리고 고흥의 바닷가를 떠나오고 원래의 삶으로 복귀한 나는 뜬금없이 그때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언젠가 ‘비에 젖은 바다’에 대해서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바닷가에서 받은 감흥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어떤 도전이랄까? 그래서 나는 무작정 컴퓨터 자판 위에 글의 시작을 한 줄 써놓았다.
“나는 지금 비에 젖어버린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런데 수년동안 ‘비에 젖은 바다’에 대한 그 어떤 영감이나 다음을 이어나갈 글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답답하여 덮어놓고 지나가던 중에 도대체 헤밍웨이가 쓴 원래 문장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겠다 하고 찾아보게 되었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란 문장은 ‘The sea is not full of water’라고 되어 있었다. 즉 ‘바다는 물에 의해서 채워지지 않는다’란 뜻이다.
한국어 번역은 임팩트가 있어서 좋았지만, 헤밍웨이의 원래의 문장을 보니 그 의미를 좀 다르게 생각해도 되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비가 되든지, 온 세상의 강물이나 시냇물이 바다로 다 들어오더라도 바다는 가득 차서 결코 넘치지 않는다라는 뜻이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족이기는 하지만 내가 소속된 한 기관의 남자 화장실 소변기 위에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란 이 문장이 쓰여있다. '너희들이 아무리 많은 소변을 보아도 바다는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라!'는 경고로 이 문장을 써 놓은 것인가!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나 ‘바다는 물에 의해 채워지지 않는다’나 그 의미는 거기서 거기 아닌가! 내가 쓰려고 했던 제목도 ‘비에 젖는 바다’나 ‘물에 의해 채워지는 바다’나 이것도 의미에는 그리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어떤 환경 때문에 영향을 받는 바다가 있다는 것인데, 충분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그 어떤 큰 충격이나 상처에도 전혀 상처나 영향을 받을 것 같지 않는 위대한 인물이나 초강대국이라도 어떤 경우에는 충격이나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높게만 보이는 큰 성채 같았던 아버지의 수그러진 뒷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그렇게 완전하고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가엾고 연약한 존재란 것을 알아버린 딸의 어떤 깨달음이랄까!
‘비에 젖어버린 바다’ ‘물에 의해 넘쳐버린 바다’에 대해서 글을 써 보아야겠다는 확신이 더 크게 들어버렸다. 내 주변에 많이 보인다. 그래도 아직 다음 문장은 생각나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