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은행도 있다.

오늘도 빈손인 이유

by 김종진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장갑 쓰고

은행을 털러 갔다.


창구 여직원에게 칼을 보여주며

돈 내놔 소리 지르지 말고


왜 여기서 그래요

저 짤리면 갈 데도 없어요.

다른 은행도 많은데

길 건너 그 은행으로 가시면 안돼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은행은 많다


오늘도 빈손이다.


- 이 글을 정리한 날짜를 보니 이렇다.

2021년 4월 28일.


코로나시기에 나는 의정부역 근처에 있는 직업훈련소에서 '조경기능사' 자격을 위한 학원을 다녔었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됨)가 나에게 해 준 말이다. 자기가 은행에 가서 이렇게 했다는 말이었던 것 같은데, 그 친구는 약간 엉뚱한 유머감각이 있어서 능히 가능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얘기를 듣고 한참이나 웃었다.


우선은 은행여직원의 대응이 마음에 와닿았다. 코로나로 살기 힘들고 어렵게 들어온 직장인데, 은행강도 때문에 이나마 직장에서도 짤리면 어쩌나하는 자기의 마음을 강도에게 전하여 공감을 얻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냥 경호벨을 누를 수도 있었겠지만, 술 먹고 난리 치는 오빠에게 여동생이 하듯이 태연하게 '오빠 지금 나 일하고 있는데 힘들어. 다른 데 가서 난리 치면 안돼?' 하는 듯한 화법의 테크닉이 엿보인다. 지혜롭고 배려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은행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가면 은행이 곳곳에 있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라는 제안도 참 신선하다. 특히 길 건너편에 있는 은행을 구체적인 대안으로 제시해주는 센스가 놀랍다. 그렇다. 세상에는 꼭 한 개의 은행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은행도 많다. 꼭 강도만 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일을 해서도 돈을 벌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꼭 피해를 주어야만이 돈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걸 이 은행원은 강도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이 칼든 사람이 다른 은행을 찾아가다가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강도의 길에서 일반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일 수도 있다.

빈 손


강도는 이 얘기를 듣고 생각이란 것을 해 보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은행은 많다는 깨달음. 여기에는 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은행에 칼 들고 가서 남의 돈을 찾는 것은 범죄가 되지만, 은행에 가서 정식으로 내 돈을 찾으면 이것은 건전한 경제활동이 되는 것이다. 아! 은행에서는 내 돈을 찾아야 하는구나! 그런데 내 돈을 찾으려면 내가 먼저 은행에 돈을 넣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내 돈을 은행에 넣기 위해서 찾아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날 그 강도 아니 내 친구는 빈손으로 집으로 갔다고 했다. 은행강도가 되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지금 직업인이 되어 은행에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는 사람이 되었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후 그는 조경기능사 자격증을 따서 국립공원 관리원이 되어서 4대 보험과 월급을 받고, 구청에서 주는 점심식사에 진심인 사람이 되었다.


친구 왈, 그전에는 아침 먹고 가방하나메고 시간 보내려고 늘 오르던 산인데, 이제 작대기 하나 메고 산에 다니면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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