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솥 가베

가마솥 같이 짙고 검은

by 김종진

월남전에서 제대한 삼촌은 미군 군용 가방 여러 개에 신기한 것들을 엄청 많이 날라왔다. 신기하기보다는 알지 못하는 이상한 글자들이 암호처럼 새까맣게 달라붙은 카키색의 포장지에 각종 색깔의 이상한 분말들이 가득한 가방을 본 나와 할머니는 이것을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를 몰랐다. 아직 국민학교 문턱을 넘지 못해 한글도 읽지 못하는 나는 각종 암호들로 가득한 흑색 종이의 봉투들을 열어보아도 이게 다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방법이란 고작 맛을 보거나 냄새를 맡는 것이 전부였는데… 소금이나 설탕 정도는 구분이 되는데 후추, 흰 가루들 …


할머니는 작은아들(삼촌)에게 검고 짙은 색의 분말가루의 용도에 대해서 들으셨나 보다. 늘 근처 집을 오가면서 마실을 다니던 노년의 동지들인 할머니 몇 분에게 작은 아들이 물 건너서 가져온 이 괴이한 물건을 맛 보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어느 날 이른 저녁 할머니는 우물에서 내가 빠께스로 길어온 물을 가마솥에 가득 붓고는 장작과 왕겨를 아궁이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이 끓기 시작하자 아마 1kg 정도는 족히 되어 보이는 카키색의 종이봉투의 배를 가르고, 가마솥에 그 가루를 밀가루 넣듯이 집어넣었다.


우리 집 부엌은 대낮에도 약간은 어두웠는데, 초저녁 무렵의 어둑어둑한 부엌은 검은 가마솥에 검은 가루가 들어가자 그 김과 더불어 그동안 우리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짙은 검은색의 수증기와 냄새로 가득 차게 되었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을 할머니들은 그동안 숱하게 들었던 월남전의 이야기들과 더불어 거기서 온 그 진기한 것?을 맛본다는 기대감에 들썩이고 있었다. 나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께서 그 검은 액체에 대해서 어떤 경건한 마음으로 움직이는 몸짓 유심히 지켜보았다.


할머니는 가마솥 아구가까이 가득 차서 끓고 있는 검은 액체를 국자로 저으면서 가끔은 하얗게 일어나는 거품을 걷어내어 반들반들해진 부엌 바닥에 흩어 버리기도 하였다. 때가 되매 할머니는 검은 국물을 국자에 조금 덜어내어 후후 불면서 입에 갖다 대었는데, 그 찰나의 순간 움찔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할머니 이마의 주름이 약간 떨리면서 입가가 약간 벌어지면서 좌우의 주름이 깊어지고, 콧등 위 부분에 순식간에 미동이 일어났던 것을 나는 보았을 뿐이다. 그것은 할머니가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전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얼굴 근육의 새로운 반응이었다. 마우스에 가득한 깊은 커피 향과 깊은 산미로 인해서 입속의 침샘이 터진 그런 커피가 아니라, 아마 지독히도 뜨겁고 쓰고 쓴 그런 맛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할머니의 다음 행위가 루틴처럼 진행이 되고 있었다.


할머니는 끓고 있는 가마솥 옆에 빠께스(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불렀다) - 사실 이 빠께스는 성한구석이 하나도 없는 유물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동네 우물에 물 길러 늘 들고 다니기도 했고,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집안 구석구석을 지근지근 문질러버리는 중에도 여러 번 상한 몸을 펴서 생존한 것이기에 여러 사람의 손길이 묻어나는 물건이었다. 할머니는 빠께스를 부뚜막 위에 올려놓고, 역시 이곳저곳 찌그러진 양은 대접으로 빠께스에 검은 물을 담아내기 시작하였다.


저 물건이 과연 어떤 맛일까?

할머니는 그렇게 빠께스에 가득 찬 검은 음료에 양은 주발을 하나 둥둥 띄워 구들장에 앉아서 아메리카노를 기다리는 여학생들처럼 재잘되는 할머니들이 있는 방으로 들고 들어갔다.

자, 그러니까 이것이 그 가베라는 것이여.

그리고 청동주발에 양은 주발로 한 움큼씩 검은 액체를 담아 주었다.

가베냄새가 아궁이 연기와 섞여서 진동하는 그 방 안에서 칠순의 할멈들이 가베 시식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기다리던 시간이던가!


1분이 안 돼서 그 모임은 파장이 되었다.

그 뜨거운 것을 입에 넣고 음미하기도 전에 생전 처음 그렇게 이상한 맛을 경험하지 못한 그녀들은 거의 토를 하면서 경악하였고, 바로 방을 나가 버렸다. 골목을 내려가면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나오는 우물을 찾아갔을 것이다. 우리도 지금은 알다시피 커피의 잔재가 입안에서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녀들이 남긴 검은 사약 사발을 앞에 두고 더 이상 이 검은 물건에 대해서 어떤 관심과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고 빠께스에 담긴 것뿐 아니라, 가마솥에 담긴 것까지 다 퍼다가 마당에 쏟아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0명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에스프레소와 같은 강도의 커피를 천연의 맛을 간직한 할머니들의 순수한 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조금 더 정보가 있었다면 설탕이라도 찾아서 섞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언젠가 시골집에 가마솥 구해서 걸어놓고, 가까운 친지들을 모아서 잘 로스팅된 스페셜리티 검은 가루를 끓는 물에 넣고 끓여서 빠께스에 덜어내어 한 뚝배기씩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제는 그래도 커피 맛에 대해서 한 줄 정도 쓸 정도가 된 내가 꿈꾸는 삶의 리스트 중의 하나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병철과 운전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