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은 오지 여행이겠구나.
인생을 여행에 빗대는 경우가 많다. 보통의 사람들이 유럽 여행을 갔을 때 혼자 오지로 여행을 떠난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오지탐험이었다. 정글이 우거지고 시도 때도 없이 야생의 천재지변에 노출되는 그 모험을 지나온 것이다.
일기 예보가 친절히 알려주는 오늘과 내일의 날씨를 알 수 없다. 어느 날은 야생 동물이 천막 안으로 쳐들어와 기껏 오랜 날에 걸쳐지어 놓은 움막이 모두 무너지는 경험. 내가 그런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아픔이 우리에게 주었던 지독한 고통을 별스러운 모험이었다고 한다면 그나마 위로가 된다. 그 모험에서 나는 ‘살아남은 자’가 되어 한결 멋있어졌다.
그때는 흉해 보였던 깊은 상처도 살아남은 뒤에는 ‘영광의 흉터’라고 말할 수 있다.
긴 우기를 지나 드디어 찾아온 맑은 날을 경험한다. 햇살의 각도, 공기의 냄새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는 흐린 날을 대비하게 된다. 오래도록 이 햇빛과 바람을 그리고 이 시간을 지키고 싶어 진다.
매일이 위태로운 정글에서 칠흑 같이 깜깜한 밤이 오면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저기 멀-리 별이 ‘반짝’하고 빛나던 찰나의 순간들이 나를 지금까지 지탱해 주었다.
첫 번째 별은 우리를 놓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해준 엄마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갈 무렵, 엄마의 외벌이로 열심히 모았던 재산이 사기를 당해 가세가 곤두 박칠 치던 때가 있었다.
원래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찾아온다고 하필 전세로 살고 있던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당시 집주인이 지역구 선거에 출마를 하면서 선거자금이 필요해 우리가 살던 집을 담보로 잡았던 것이었다. (그 집주인은 당연히 낙마했고, 돈은 아직도 해결이 안 되었다.)
*여담이지만 그 집주인은 설상가상으로 같은 학교 친구의 아빠였다.
나는 아빠도 이 모양인데 집까지 망했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사실 한참 사춘기를 혹독하고 겪고 있을 때라 엄마를 원망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엄마는 내가 다니고 싶었던 논술 학원에 등록시켜 주었다.
당장 라면 사 먹을 돈도 귀할 만큼 힘들었지만 빚을 지더라도 책 사는 데 돈은 아끼지 않았다. 책을 산다는 행위에는 유일하게 ‘아끼지 말라.’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엄마는 버텨주었다. 엄청 난 무게의 짐을 지고 자기도 고장 날 법했을 텐데 끝까지 살아내주었다.
덕분에 나와 내 동생의 최소한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친구를 사귀고, 학교에 출석하고, 친구집에 놀러 가서 하루를 지새우며 수다를 떨거나, 수학여행에도 참석했다.
자세히 파보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그렇게 학창 시절을 지냈다. 아픔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게 나의 노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 보면 ‘엄마의 버티기’ 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해봤던 경험을 해본 것이 그때는 당연했고 지금은 감사하다.
두 번째는 대학교 전공을 ‘심리학’을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과목으로 심리치료학 와 상담학을 전공할 수 있었고 ‘가족치료’라는 과목을 들을 때는 전공 수업 중에 눈물이 나서 화장실에 몇 번이고 들락거렸다. 나는 배우면서 나 스스로를 치료하는 ‘셀프-치료’를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난 점이다. 물론 시련도 있었다. 남편이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시가의 엄청난 반대를 겪었다. 결혼식에 참석을 안 하겠다고 선언한 시어머니 때문에 남편이 정말 많이 힘들어했다. 어머니는 마치 둘 중에 고르란 식이었는데 당신과 ‘그 여자애(나)’ 중에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는 느낌으로 주장을 밀어붙이셨다.
해서 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포기하려고 했다. 그 와중에 어머니의 마음이 돌아선 운명 같은 사건이 있었다. 마침 시어머니의 가까운 친척이 우리 회사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몇 년간 나는 그 회사에 몸담고 있었고 그분이 예비신랑 쪽 친적이란 건 꿈에도 몰랐던 반전이었다.
내가 그쪽의 결혼 상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친척분이 시어머니에게 내 칭찬을 그렇게 하셨다고 뒤늦게 전해 들었다. 남편은 객관적으로 볼 때 철이 없다. 체력도 약한 데다 멘털도 약하다. 지금도 8시만 되면 졸려서 어쩔 줄 모른다. 시어머니랑 똑 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잘 만났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는 나의 치열한 이면과 과거를 모두 들었음에도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안타까움과 작은 공감을 보일 뿐이었다. 겪어보지 않았던 일에 대해 입을 대지 않으려고 했다.
결혼 10년 차가 된 지금까지도 내 가정사에 대해 재단하거나 평가하거나 질책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나와의 결혼이 모험이었을 수 있다. 기꺼이 나와 손잡고 모험을 해 준 사람이다. 결혼하고 한참 지난 최근의 어느 날, 남편과 친정에 갈 일이 있었다.
우리는 방에 있었고 남편이 갑자기 울었다.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지도 않았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정확히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너무 가여워 눈물을 쏟았다. 남편은 내게 “너무너무 힘들었겠다. 상상조차 되지 않아” 하고 말했다.
방 문 밖에서는 엄마가 오래간만에 온 우리를 위해 음식을 하며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신 들렸다. 지난날의 내 슬픔이 뭔가 그 순간 희미하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때 남편의 눈물이 결코 위로의 의미가 아니었지만 (본인이 슬퍼서 운 것 일 듯?) 뜻밖에 위로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멀리서 봤을 때 거대하고 높은 산을 등반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허무함과 벅찬 기분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는 안도했다. 내가 평가당하고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 ‘나 스스로도 충분히 괜찮다’는 사실을 항상 증명해야 한다는 오랜 속박감에서 벗어난 느낌이었다.
인생이 모험이고 여행이라면, 그래서 너무너무 힘들다면 깜깜한 밤하늘에서 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가 되기도 하고, 멀고도 가까운 곳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빛을 내고 있음을 아는 순간 거대한 파도가 잠잠해지고 동이 트는 새벽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