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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 May 24. 2024

아빠를 미워해도 괜찮아.

사람은 본디 자신의 뿌리인 부모를 부정하는 데 불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유럽이건 미국이건 아시아 건 나라를 불문하고 부모욕은 최악의 욕으로 손꼽히는 것처럼 말이다. 


일종의 본능적인 거부감이기도 해서 부모님을 욕하는 건 나를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끊임없이 아빠를 미워하는 이유를 찾고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 엄마는 늘 우리 자매에게 아빠를 이해하는 게 어렵다면 불쌍하게 여기라고 말해주었으나 택도 없었다. 


정신병은 아빠를 정상적인 사회인 으로써의 기능을 잃게 했을 뿐 아니라 인간 으로써의 존엄성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더러웠다. 감정적으로 더럽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실제 모습과 몰골이 늘 상 더러웠다. 이건 정말 옆에서 조현병 가족을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환자는 자신의 몸 상태와 외관이 관리가 안된다. 마치 주요 부품이 심각하게 고장 난 기계와 같다. 


정상적 사고 회로가 고장 난 인간은 청결해야 한다는 자기 관리 기능이 사라진다.  


비 오는 날에 비를 그대로 맞은 몰골로 다닌다 거나, 한 여름에도 며칠 채 씻지 않는다. 심지어 신발 밑창이 다 뜯어진 상태로 거리를 활보하기도 한다. 단추가 있는 상의는 제대로 단추가 채워졌을 리 만무하고 바지는 내려가면 치켜 올리 지도 않는다. 몸에서는 담배 절은 내와 악취가 났다. 게다가 남의 시선 따위야 느껴 질리 없었을 거다. 


머리는 비듬이 내려앉아 눈이 쌓인 것처럼 보이는 새 둥지 같았다. 기차에 뛰어든 다음부터는 등 근육이 말을 안 듣는지 걸어 다닐 때도 자세도 어딘가가 구부정했다. 손가락은 꼭 네 번째 손가락만 핀 채 나머지 손가락들은 접고 다녔는 데 아무리 말해도 고쳐지지 않았다. 


화장실도 당연히 같이 사용할 수 없었다. 5살짜리도 이 보다는 변기를 깨끗하게 쓸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까 자세한 설명은 읽는 이들을 위해 남기지 않겠다. 


물론 금연에 대한 자발적 의지가 생길 리 만무했다. 아빠는 끊임없이 줄 담배를 피워서 아빠가 자는 방에 들어가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 아빠와 함께 산다는 건 사춘기 딸들에게는 지옥이었다. 


거리에서 떡볶이라도 사 먹다가 아빠가 지나가면 우리 자매는 아빠를 모른 체했다. 처음엔 모른 체 했단 사실 자체가 너무 힘들었고 마음이 늘 가라앉았다. 


아주 가끔 나를 발견한 아빠가 먼저 아는 체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래도 인사를 나누지 않고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나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속으로 뜨끔 하지도 않았다. 


분노의 감정. 내 가정이 저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어졌다는 원망. 그리고 한 없는 부끄러움이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이었다. 불쌍함과 가여움이 들지 않았던 건 일방적으로 우리가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너무 커서였다. 


아빠는 엄마의 인생을 너무 고생스럽게 만들었다. 엄마 혼자 집안 살림부터 돈벌이, 그리고 우리의 양육자로서 역할을 전부 도맡아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는 빠르게 철이 들었다. 


그가 조금 정상으로 돌아온 날, 본인이 먹은 설거지라도 한번 해줬으면 좋겠다고 한 소리 했다가 불효녀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기도 했다. 


나에게 그는 그저 우리 집에서 살면서 밥을 축내고 더러운 데다, 이상한 소리까지 해대는 무능의 아이콘이었다. 


너무너무 슬프고 괴로우면 공부도 잘 안된다. 가정이 늘 화목하고 건강한 상태인 아이들이 학업성취도가 훨씬 뛰어나다는 연구결과도 많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 지독하게 슬프고 괴로워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탈출의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빠가 또 괴상한 행동이라도 보인 날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책을 폈다.

눈물이 노트를 하염없이 적셨지만 눈물을 훔치지도 않고 악으로 깡으로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다.   




아빠가 어느 정도 자신의 병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차도가 좀 생겼을 무렵)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의 인생이 슬픔으로 얼룩진 죄를 사죄해야 한다고. 그간 고통 속에서 우리들이 희생했으니 그 아픔을 알아주라는 의미였다. 

그날은 정녕 눈물과 통곡의 저녁이었다. 듣고 있던 아빠는 내가 아파서 그랬던 건데 딸이 돼서 아빠를 신고나 하고 아주 못 돼 먹은 년이라며 나를 원망했다.  


물론 원래부터 싫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는 싫다는 감정도 들지 않는다. 더 이상 밉지 않은 감정. 사실은 이게 제일 무서운 것 같다. 



내일 동생이 결혼한다. 동생은 아빠 손잡고 입장하는 신부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마음이 너무 가엽고 안타깝다. 

 

예전에 난 아빠 손을 잡고 입장하는 결혼식을 했었다. 결혼식 때 아빠 손 잡는 게 너무너무 어색하고 힘들었다. ‘30초간 숨도 참는 데 뭐’ 이런 심정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가서 뚜껑을 열기 전에 숨을 꾹 참는 심리랑 비슷했달까.


그때 아빠는 어땠으려나. 나를 잘 키워 보낸다는 생각이 들긴 했을까. 입장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을지 궁금하다. 내가 누구랑 결혼하는지, 사위 이름이나 알고 있었 을지 모르겠다. 

 

동생에게 훨-훨 날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나와 같은 상처를 안고 오랜 시간 속을 끓였을 아이다. 

새 보금자리를 찾았으니 모쪼록 그녀 마음이 한가득 평안하기를 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이 앞으로 그녀를 더 괴롭히지 않기를 바란다.  


아빠를 미워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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