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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 May 17. 2024

아빠를 신고한 날.

“진짜 이래도 되나.” 112를 누를까 말까 몇 번이고 망설였던 것 같다.
한국에서 그것도 딸이. 친아빠를 자기 손으로 신고하다니.

그날의 기억은 다른 기억에 비해 비교적 선명하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였다.  

1층에서부터 들리는 쩌렁쩌렁한 사운드에 우리 집에서 나는 거란 걸 단박에 눈치챘다.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 안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나를 더 절망케 했다.


아빠는 옥상에 있었다. 세상을 향한 분노에 휩싸여 정신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1분만 그렇게 소리쳐도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갈 것 같은 데 아빠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등 뒤에 불이 붙은 마라토너 같았다. 쉬지 않고 소리 지르는 소리에 듣는 내가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날은 뭔가 달라도 심하게 달랐다.


우리 집 맞은편 집에 살던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불쌍하게 느껴졌다. 미안하고 쪽팔리고 부끄러웠다.  


‘끼-이익’ 더럽게 무거웠던 옥상문을 열었다. 한껏 더 크게 들리는 공포스럽고 폭력적인 목소리에 가까이서 노출되자 나는 한껏 움츠러들었다.


옥상의 한쪽 모서리 구석에서 아빠를 발견했다. 심호흡 끝에 용기 내 아빠를 불렀다.

예전에 베란다에 끌려나갈 뻔했던 기억이 있어서 다시 그때 기억에 오금이 저려 오는 기분이었다.


“아빠..! 그만해! “


내 목소리가 아빠의 거대한 육성에 그대로 묻혔다.


한번 더 온몸에 힘을 주고 아빠를 불렀다.


”아빠!!! “


정말 이상했다. 다른 소리가 아예 안 들리는 것처럼 아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내 목소리는 공중에 그대로 흩어졌다. 어딘가에 몰입되어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보았다.


가까이서 본 아빠의 상태는 더욱더 심각했다. 환청에 사로잡혀 있었고 눈동자는 회색빛이었다. 약을 거른 게 분명했다.


쩌렁쩌렁 욕하는 소리에 하나 둘 다른 집 창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학교 코앞에 살았고 막 학교가 끝나서 동네에는 친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이 사달이 난 걸 동네에 무조건감추고 싶었던 마음도 컸던 것 같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겠단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언젠가 엄마가 나에게 “정말 네 힘으로 뭔가 안 되는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경찰에 신고해라.”라고 말한 게 생각났다.  


무엇보다 아무도 내가 신고한 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경찰은 아빠가 진정될 수 있게 잠깐 어디 끌고 가거나 자제시키는 데 도움을 줄거라 믿었다.


핸드폰 자판에 손가락만 갖다 대기를 여러 번. 결국 112에 전화를 걸었다.


‘또르르- 또르르’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바로 경찰이 전화를 받았다. 2초 정도 침묵. 진짜 경찰이 전화를 받다니.


여보세요?  신고자분?


이라는 경찰아저씨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거의 소리치듯 말했던 게 생각난다.


“도와주세요..여기 송수동 옥상이거든요. 저 사람이 진정이 안돼서요.. 평소랑 달.. 달라서요. 어어…“


눈이랑 입에서 눈물과 침이 폭포수처럼 흘렀다. 그저 도와달라고 애원한 것 같다.


얼마 안 가 경찰이 도착했고 옥상에 있던 아빠가 내려왔다. 현관 앞에서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빠와 실랑이하며 우리 집 앞은 어수선해졌다.


갑자기 경찰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 아빠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신고자가 도대체 누구냐고 큰소리로 따져댔다.


계단에 숨어있었던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소리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주머니에서 우렁차게 벨소리가 울렸다.


복도를 울리는 벨소리에 나는 아연 실색했다. 경찰이 나를 찾으려고 건 전화였고 숨어있던 신고자의 정체가 들키는 순간이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니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신고자분 사인을 받아야 해서 그러니 여기로 와주셔야 합니다. “


나는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온몸에차오르는 뜻 모를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집 앞에 도착하니 아빠랑 경찰 두 명이 여전히 실랑이하고 있었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나의 쭈뼛쭈뼛한 등장에 경찰들의 눈동자가 힘껏 흔들렸다. 아빠는 화난 눈으로 몇 번이고 되물었다.


“진짜 네가 신고했어? 얘가 했대요???”


그리고 이어지는 경찰들의 몇 번의 질문을 끝으로 상황은 허무하게 종료되었다.


“신고자분이.. 따님 이셨어요? “


”네.. “


”아버지 약 어딨 는 줄 알아요?”


(고개만 절레절레)


“빨리 약 먹으라고 하세요.”


“네..”


이게 다였다. 따로 경찰서에 연행해 가는 나의 시나리오는 무너졌다. 내가 생각한 제압 시나리오는 이게 아니었다. 상황은 잠잠해졌지만 나는 마음이 불타올랐다.


무척이나 허탈했고 집에 아빠와 나만 남았다. 더럽게 무거운 옥상문 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감당해야 했다.


이 사건 이후로 나에게는 <감히 아빠를 신고한 아주 고약한 년>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이 생겼다. 아빠는 화가 날 때마다 나를 세차게 걸고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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