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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 May 03. 2024

누가 더 슬픈지 대결할까.

순수한 아이들은 자기 가족 이야기를 서슴없이 한다.

성장하면서 감춰야 하는 부분은 감추는 자기 보호 능력이 생기기도 하지만

친해진 친구에게 주는 특권 같은 걸로 생각하기도 하나보다.  ‘너에게만 들려주는 이야기’인 셈이다.


딸이 소풍 가는 날 학교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 나눈 이야기를 매우 가볍게 나에게 던졌다.


“엄마! 소원이는 입양 됐대! 그래서 진짜 아빠 엄마가 아니래!”


소원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내 아이에게 해준 건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듣자마자 대답했다.


“오! 너무 감사하다. 소원이가 그 얘기를 해준다는 건 소원이네 엄마 아빠가 소원이를 진짜 사랑하기 때문이야.”  



나도 어린 시절 진짜 나와 친해졌다고 여기면 (탑 5 안에 든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우리 집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생각한 적이 있었다.


우리 아빠가 ‘미쳤다’라는 개념이 없는 어릴 때라 아빠가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한다.라고 얘기하면서 몇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주면 대부분 어린아이들은 당황하거나 같이 울어주곤 했다. 그게 참 뭐라고 끈끈한 애정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같이 울어주는 이가 아무 관계없는 ‘타인’이라는 데서 느끼는 고마운 마음과 더불어 내가 꾹꾹 눌러 감춰온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오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너에게 모든 걸 말했으니 넌 나의 진정한 친구야.'라는 순수했던 감정이 크면서 완전한 착각이었다는 걸 뼈저리게 알았다.


누군가 나를 안쓰럽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은 너무 따뜻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그러나 그 친구와 함께 지내는 세월이 흐르면서 ‘너 보다 나는 훨씬 더 행복해’라는 비교의 표현들이 행동과 대화에서 묻어 나오기도 했다.


때로는 내가 말하지도 않은 부분까지 더 MSG(조미료)가 첨가돼서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문으로 다시 내 귀에 들어올 때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점점 크면서는 자기의 아픈 가정사를 힘겹게 털어놓는 친구에게만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한 개 받았으니 너에게도 내 것을 한 개 줄게.’ 개념으로.


대학 시절 친해진 친구들과는 서로 알고 만났던 건 아니지만 모두가 다 저마다의 아픔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서로 고백 배틀처럼 누가 누가 더 아픔을 겪었나로 친구의 자취방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 이 있었다.  



작게는 부모님의 이혼부터,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도망가고, 아빠가 스님이 되었다 던가 하는 자극적인 이야기는 우리들의 고백 배틀 소재였다. 정말 속상하게도 그 배틀의 승자는 내가 되었다.




"너네 17층 자기 집 베란다에서 죽음의 공포 느껴본 적 없지?"라고 덤덤히 내뱉는 질문에 대적할 만한 소재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10살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대부분 밖에서 시간을 보냈던 아빠가 그날은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집에 있었던 모양이다. 하교 후 현관문을 열었는데 아빠는 베란다에서 방충망까지 다 열어서 허공에다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집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이미 옆 집에서 신고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아직 신고까지는 안 간 듯했다. 내가 하교하는 소리도 못 들었는지 아빠는 연신 쌍욕을 해대며 베란다 밖의 누군가와 가열차게 싸워 댔다.


아빠 입에서 나왔던 욕을 글자로 쓰려 다가 다시 지운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타이핑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폭언이었다.


그러다  조심스레 “아빠!”하고 불렀을 때 아빠는 뒤돌아 큰 발소리를 내며 거실 끝에서 떨고 있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끔 예능 프로에서 ‘광인’ 또는 ‘안광’이라고 하면서 우스갯소리로 눈빛이 미쳤다고 유머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있는데


실제로 찐 ‘광인’에게서 나오는 ‘안광’을 그날 나는 보았다.

말이 안 나오고 숨 막히는 공포가 나를 잠식해서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릴 지경이었다.


아빠는 “저게 안 보여? 안 들리냐고!!” 하며 나에게 강하게 소리를 쳤다.

나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아빠는 갑자기 내 손목을 잡고 힘주어 버티는 나를 베란다 쪽으로 끌기 시작했다.

이성과 감성이 소용돌이치고 방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내가 힘으로 버티면 버틸수록 아빠는 강한 힘으로 나를 베란다로 끌고 갔다.


방충망까지 다 열린 새시 창으로 맑고 파란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물이 잔뜩 고이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때 나는 혹시 아빠가 나를 베란다 밖으로 던질 수도 있겠다 생각했나 보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덮쳐왔던 순간이었다.


이 얘기를 끝으로 우리의 고백 배틀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여느 20대 여대생의 모습과 다르지 않게 눈 부신 시절을 보냈고, 이제는 서로의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 친구들과 잡담을 하는 나이로 자랐다.


나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누가 더 아프고 속상했던 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원래 자기가 아팠던 기억이 제일 스스로 한테는 강렬하거든. 남이 암으로 고생해도 당장 내가 걸린 감기가 더 아픈 것처럼 말이야.”


가끔 세상에서 나만 이런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릴 땐 누가 더 슬픈지 재보는 대회가 있다면 내가 1등일 거라고 자신했다.


이제 나는 30대 중반이 되었다. 더 이상 남과 힘듦을 비교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해탈한 것도 아픔을 극복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아픔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굳이 더 아팠던 과거를 꺼내서 남을 무시하거나 나를 깎아내리지 않으려고 한다.

과거의 기억에 짓눌려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잃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약점이라고 생각하면 그대로 약점이 되지만

이걸 활활 태워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이게 나에게 엄청난 성장 동력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가슴속에 태울 소재가 많은 사람이라 스스로를 잘 다독이며 산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이 인터넷에 밈처럼 돌아다닌다. 사람들이 일명 '꼰대'라고 일컬으며 듣기 거북해하는 이유는 그 말의 근간에는 ‘비교’가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나 때는 이래저래 힘들었는데 니들이 이 정도 사는 건 다 축복이야.

나 때는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라며 듣는 이의 고충을 평가하고 폄하하는 속내가 들어있다.


누가 더 힘들고 슬픈 건 없다. 각자의 생김과 모양대로 견뎌내는 역치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똑같이 맞았지만 타격감이 누가 더 적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겨냈는지 과정이 중요할 뿐이다.


아주 옛날 선사시대에는 약육강식이었다. 들짐승이나 천재지변에서 살아남는 야생에서의 생존이 중요했다면 현대 시대에는 양육강식이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 같다.


나는 일종의 천재지변의 시기를 지나왔고, 상처가 남았을지언정 곪아 터지지 않게 잘 살아남았다.


아이에게도 다시 한번 단속하며 말해주었다.  

“입양되었다고 얘기 해준 친구 있잖아? 비밀이라고 말 안 했어도 쉿. 너랑 나랑만 알고 있자 알았지? 하는 나의 말에


딸은 “왜?”라고 돼 물으며 말했다.


이미 반 친구들 다 알고 있는데?라고 천진하게 말하는 딸의 모습에서

‘별일도 아닌데 왜 혼자 그래.’라는 속마음이 엿보였다.






* 매주 <금>요일 연재중입니다. 다음화는 5/10일 연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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