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리니 Apr 26. 2024

너 우리 딸이랑 놀지 마!

햇살이 유난히 좋은 어느 날,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서아네 엄마가 말을 걸어왔다.


“자기는 집에서 막내딸이지?”

“아뇨? 왜요?”

“아니, 항상 밝고 센스도 있고.. 딱 막내딸 같은데.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것 같아~”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K-장녀다. 엄마의 외벌이로 지냈고, 심지어 아빠는 찐 광인이었기 때문에 나의 성장기는 바람 잘 날 없었다. 숨기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숨겨지는 건 아니었을 이 질풍노도의 가정사는 밖에서는 다행히도 잘 티가 안 났다.


초등학교 때는 늘 반장을 도맡아 했고 모범생이었으며 심지어 전교회장도 했었다. 공부도 곧 잘했었다.


그렇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안 새는 경우가 있었으니 바로 나였다.

다만 어른들이 보기에는 유난히 철들어 보이고 어른스러운 모습이 이상해 보이려면 이상했겠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주변 어른들이 예뻐하는 아이였고 친구 사귀는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동생에게 일어났다. 1살 터울의 여동생은 나보다는 소극적인 편이었고 어딘가 모르게 약간 주눅 들어 있었다.


8살이 되던 해 동생에게 친하게 지내는 학교 친구가 생겼다. 우리 집에도 놀러 오고 내 동생도 그 친구집에 놀러 가고 둘도 없는 친구처럼 다정하게 잘 지내던 친구였다.


별 트러블 없이 1년 정도 지냈을까 동생이 울면서 집에 왔다. 이유를 들어보니 그 친했던 친구 엄마가 우리 집 사정을 듣고는 우리 아이와 놀지 말라고 동생에게 직구를 던진 모양이었다.  


당시엔 우선 내 일이 아니었고 동생도 금방 잊는 듯해서 엄마도 나도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겼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그게 동생이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어버릴 줄은 몰랐다. 동생은 줄 곧 연애는 했지만 30대 중반에 다 되어서도 결혼을 두려워했다.


동생이 직접적으로 그 일을 크고 나서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린 시절에 가장 친한 친구랑 더 이상 가족 문제로 친하게 지낼 수 없게 된 건 실로 엄청 난 상처였다.


아직 심리적으로 단단해지지 않은 물렁한 어린아이가 받았을 데미지는 감히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커서 전부 출가하고 나서부터 <아빠가 아팠던 일>은 커다란 코끼리 같은 존재였다. 집 안에 분명히 무겁게 존재하지만 마치 안 보이는 것처럼. 그 누구도 집 안의 코끼리에 대해서는 언급을 잘 하지 않았다.


결혼을 약속한 상대방 가정에서 우리 집을 무시하거나 거부당하게 되는 경우를 동생은 걱정했다. 아마 그간 상처받기 싫어서 차곡차곡 공고히 쌓아 올렸던 만리장성 같은 방어벽이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과, 우리 집에 있는 코끼리를 직면해야 한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을 것 같다.


어릴 때는 마냥 어떻게 그렇게 남의 어린 자식에게 면전에 대고 “우리 딸이랑 놀지 마.”라고 할 수 있는지 잔인하게 느껴지고 원망스러웠다.


어른이라면 응당 어른만의 우아한 방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생이 너무 소중해서라기보다, 우리 가족이 전체가 모욕당한 것 같은 속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속 깊은 원망은 내 자식을 키우면서 잦아들었다. 내 자식과 놀지 말라고 경고한 그 아이의 엄마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면서부터다. 나 조차도 내 자식이 정신 질환자의 자식과 친하게 지낸다고 했을 때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받아들여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이 앞에서는 어물쩡 유연한 사고를 가진 척하겠고, 직접 나서서 그 아이에게 같이 놀지 말라고 경고하진 않겠지만 나 또한 마음속에 파도가 일렁일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 집의 코끼리는 하필 우리가 든든한 울타리가 가장 필요했던 시점에 큰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다.


그간 아빠는 망상과 환청 증상이 있었던 정신질환자 치고는 혼자 소리치고 중얼거리는 것 외에 타인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 외부에서 큰 이벤트가 없었던 아빠가 처음으로 경찰서에 갔던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가까운 지구대에서 엄마에게 연락이 왔는데 아빠가 경찰서에 잡혀 있다고 했다. 아빠는 버스정류장에서 엄마와 똑같은 지갑을 가지고 있는 여자를 보고는 차마 담을 수 없는 욕을 하며 왜 자기 와이프 지갑을 당신이 가지고 있냐고 경찰서를 가자고 하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난 아직도 엄마가 왜 아빠를 버리지 않았는지 정말 의아하다.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리고 나열할 때마다 가슴속에서 울화가 치미는데 엄마는 저 황당한 일들을 어떻게 겪어 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아빠가 경찰서에 잡혀 있단 얘기를 들었을 때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빠가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않게 되길 바랐다.


나는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게 되면 왜 엄마도 아닌 아빠가 늘 집에 있는 건지 설명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아빠가 오늘 마침 휴무일 이라던가 아빠가 오늘은 아파서 집에서 쉰다 던가 하는 뻔한 거짓말을 하기가 싫었다.


나의 밝음과 편안해 보이는 모습은 어쩌면 일종의 <기술> 일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익혀온 삶의 노하우 같은 것 일지도 모른다. 적당한 센스와 유머를 시의 적절하게 활용한다. 그리고 예민하게 상대의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며, 내면의 아픔은 드러내지 않는다. 나도 몰랐던 나만의 삶의 방식은 웃기기도 하고 동시에 슬픈 기술인 셈이다.


눈물 나게 슬프지만 이 기술을 통해 얻은 게 많다.


내가 아팠던 만큼 다른 이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고 , 덕분에 사회적으로 평판도 좋다.
계곡이 깊었던 만큼 찰나의 따뜻한 햇살 한 줌에도 감사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어려움을 버텨온 시기가 있어서 그런지, 살면서 잠깐 장애물을 마주치더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명제를 체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보이는 것과 남이 보는 시선에 집착하지 않는다. 우울과 슬픔이 나를 지배하게 두지 않고 오랫동안 그 우울에 빠져 있지 않는다.


언젠가 엄마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는 이런 일을 겪어 냈기에 남들보다 더 크고 단단한 속을 가지게 되었을 거라고.


20대까지만 해도 잘 와닿지 않았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사실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버텨준 엄마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은 공평하다는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지만 아주 가아끔 진짜 공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최악의 아빠를 두었지만 동시에 최고의 엄마를 선물로 받았다는 점이다.

신은 내 삶의 저울에 최악의 것과 최고의 것을 동시에 올려 두어 균형을 맞추어 주었다.




* 매주 <금>요일 연재중입니다. 다음화는 5/3일 연재 예정입니다.

* 제 글을 읽고 위로와 지지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내가 조금 별로면 어떻습니까. 그런대로 나 인걸요. 늘 응원하겠습니다.  

이전 02화 죽도록 아빠를 미워한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