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증상이 심해져 결국 입원을 했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먹고 망상증상도 호전되었다. 아주 약간 나아졌을 무렵, 병문안을 온 엄마에게 아빠는 엉엉 울며 무릎을 꿇고 빌었다고 들었다.
"제발 나 좀 여기서 내보내 줘.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여기 약을 먹으면 너무 졸리고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어."
마음이 약해진 엄마는 퇴원 수속 절차를 밟아 아빠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
사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평생 입원을 했어야 한단 이야기가 아니다. 아빠는 완치가 되기 전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때 나였어도 다시 멀쩡해지고 정상적인 남편이 나에게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하는 걸 모른 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아마 아이들을 키우며 홀로 강하게 버티고 있는 척했지만 마음 한편엔 정상적인 가정을 다시 되찾고 싶다는 강한 염원이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아이를 키워 본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는 아이들 데리고 애써 좋은 데 가지도 말라고 한다. 어차피 다 기억도 못할거 돈만 쓰는 거라고 좀 커서 가라는 얘기를 왕왕한다. 어릴 때 기억은 정말 장기기억에 머무르기 힘들까? 나의 경우는 아니었다.
아주 강렬한 섬광처럼 공포스러웠던 기억이라 그런지 지금도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아픈 기억을 여전히 안고 산다.
병원에서 돌아온 아빠는 병가를 내고 증세를 살피며 집에 머물렀다. 우리는 학교에 다녔고 아빠는 낮동안 엄마가 출근하면 홀로 밖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에서 돌아온 아빠의 표정에서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몇 학년인지, 내 생일은 언제인지, 내가 어느 학교에 다니는 지도 아빠는 몰랐다. 엄마가 퇴근하기 전 우리들이 집에 오면 먹으라고 놔둔 간식도 냉장고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딸들이건 가족이건 1차원 적인 사고만 할 수 있는 정신이상자만 집에 존재했다.
아빠의 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자기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했고, 혼란스러워했으며 그 혼돈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표호 했다. 누군가 자신의 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도 계속 받아쳐야 한다고 했다. 속으로 받아친 게 아니라 어린 딸들도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치고 욕하며 싸워댔다.
나는 너무 무서웠다. 베란다에 나가 있는 힘껏 쌍욕을 내뱉고 있는 아빠를 보면 학교에 있는 엄마에게 울며 빌었다.
"엄마, 빨리 와 아빠 또 이상해. 나 너무 무서워.."
이웃들이 소란스러워 신고해서 경찰이 집에 오거나, 엄마에게 찾아와 당장 이사 가달라고 말했다는 건 나중에 다 커서야 알았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강박 증세도 있었다. 특정 야채나 고기는 절대 먹지 말라는 것이다. 그걸 온 가족에게 강요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그게 '포도'라는 과일로 정해지면 우리는 과일도 숨어서 먹어야 했다.
어느 날은 내가 학교에 유행하는 바나나 핀을 머리에 꽂고 간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보고 아빠는 소파에 앉아있다가 고함을 질렀다. 이유는 내가 꼽은 바나나 핀이었다. 아빠는 내가 아침에 공들여 곱게 빚어 힘들게 꼽은 내 머리핀을 낚아채 갔다.
어느 날 엄마가 아빠의 강박증 때문에 아빠한테 애들은 챙겨야 하지 않겠냐고 따지고 들었다가 아빠는 그 즉시 엄마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
엄마는 황급히 우리를 데리고 도망치려 했으나 또다시 아빠손에 잡혀 안방으로 끌려갔다.
나는 필사적으로 동생의 손을 잡고 울며 부르짖는 동생을 진정시켰다. 동생이 소리 지르고 반응하면 아빠가 더 과하게 흥분할 것 같아 눈물이 나오는 걸 참고 동생을 달랬다. 그리고 안방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최대한 안 들으려고 노력했지만 그건 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쿵. 쿵. 퍽. 퍽. 요란하게 장롱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엄마는 아빠의 손에 이끌려 장롱 앞에서 힘없는 나뭇가지처럼 맞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울면서 살려달라 외치며 빌었다. 잠시 후 모든 소동이 끝나고 안방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나온 엄마는 눈에 시퍼런 멍이 들고 머리를 산발한 채 우리부터 찾았다. 숨죽여 울고 있는 어린 두 딸에게 달려와 말했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놀랐지.
자. 우리 기도하자.
엄마가 기도할게. 하며 눈물이 터져 나와 어깨를 들썩이는 우리를 힘없는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정말 속사포처럼 영영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오랜 기도를 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보고 계시다면 이 가엾은 두 딸들을 지켜주시고..."
아빠는 약도 잘 챙겨 먹지 않았다.
정신분열증의 강력한 증상 중 하나는 자기가 그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도 포함된다.
자기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모두가 자기가 헛것을 본다고 하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빠는 어느 날 나보고 너는 저 말이 정말 안 들리냐고 물어 온 적도 있었다.
아빠는 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서서히 말려 죽이는 걸 거라고. 엄마가 의사랑 짜고 자기를 죽게 할 거라며 병원에 문진조차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엄마는 어느 시점부터 아빠의 약을 빻아 아빠밥에 몰래 넣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빠의 증세는 날로 심해져 갔기 때문이다.
정말 심한 날엔 아빠는 엄마를 향해 접시를 깨고 공격해 왔다.
바로 그날이 아직도 강렬한 섬광처럼 잊히지 않는 그날이다. 누가 화면에 슬로를 건 것처럼 동생의 위치, 엄마의 외마디 비명, 아빠가 접시를 깰 때 여기 처기 퍼지는 파편들이 천천히 눈앞에서 움직였다.
나는 그날 이후로 엄마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사이 엄마가 다치거나 밤에 자다가 아빠가 엄마를 죽일까봐 집안의 칼을 숨겨두기도 했다.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까지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어났던 몇 가지 에피소드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아빠를 있는 힘껏 싫어했다. 싫어하는 티도 아주 팍팍 냈었다.
한 공간에 같이 있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도 아빤데.. 너를 낳아주신 분인데 가엽게 여겨야지 그렇게 못된 생각하고 저주하면 안 된다며 같잖은 핀잔을 듣기도 했다. 아주 가끔 말이 통할 것 같아 가정사를 오픈하면 그때부턴 그게 오랜 시간 나를 따라다니는 약점이 되었다.
이제는 어디 가서 아빠를 미워한단 얘기는 하지 않는다. 유교사상이 심한 우리나라에서 부모를 미워한단 건 중죄에 가깝기 때문에 잘 모르는 남이 들으면 천하의 호로자식이 되기 십상이다.
사실, 진짜 미워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기반이 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아빠가 많이 나아졌다. 스스로 병을 인지했고 바둑을 두고 노후를 엄마에게 의탁해 살고 있다. 엄마는 우리의 바라던 이혼은 끝끝내 하지 않았고 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이 땅의 의무라며 아직까지 아빠를 보살피며 지내고 있다.
그 덕에 나는 결혼할 무렵 저주하는 아빠의 손을 붙잡고 입장하기 죽기보다 싫어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여전히 모든 이야기가 나의 엄청난 약점이 될 걸 알지만 쓴다. 쓰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다. 스스로 나를 치유하며 돌보며 이제는 정말 다 괜찮아졌다 느끼지만 혹시나 남아있는 잔여물도 깨끗이 닦아내기 위해 쓴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하기 위해 쓴다.
그리고,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누군가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은 이가 있다면 우리 같이 이겨내고 있으니 괜찮다고 전하고 싶다.
우리 엄마가 늘 나에게 힘들 때마다 해주었던 문장을 끝으로 2화를 마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이 잘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