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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 Apr 18. 2024

살아있는 아빠를 추억하는 이유.

나는 36세. 아빠가 살아있다. 그렇지만 아빠를 추억하는 몇 가지 기억을 안고 산다.


추억이라는 건 잊지 못하는 애틋한 기억을 뜻 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다. 그 단어 자체의 어감이나 뜻에는 지나간 일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기억한다는 느낌이 담겨 있다. 나는 아빠가 멀쩡히 살아 있다. 그럼에도 아빠를 추억하며 산다.


어릴 때는 멋모르고 우리 가정의 아픈 가정사를 친한 친구랍시고 ‘너만 알고 있어.’ 하고 말해주었다.

'나와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이쯤은 알아도 돼.' 라는 뜻으로 그랬을까. 나는 그게 그렇게 나의 지우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은 너무나 무뎌지고 오래되어 성장과정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다.  노트북을 켜고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자니, 눈앞이 뿌예지는 것이 아마도 이 이야기는 여전히 나의 눈물버튼임에 틀림없다.



때는 내가 6살 정도로 유치원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우리 집은 괜찮았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그 시절에는 아주 훌륭했다고 본다. 좋은 신축 아파트에서 지냈고 부모님 두 분은 교단에 계셨다. 안정적인 직장 그리고 딸 둘. 평안했다.


기억을 더듬어 아빠가 어딘가 이상해지기 시작할 무렵이 언제부터였는지 생각해내려고 해 봤지만, 정확히 그 시점을 짚어 내기가 쉽지 않다.


엄마는 그 때의 아빠의 초기 이상증세를 외면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히 미쳐버리기 전까지 아빠는 전조 증상이 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이야기에 따르면 초반에는 엄마를 미친 듯이 의심하고 추궁했다고 한다. 분명히 학교에 상간남이 있다고. 그리고 엄마랑 연락이 닿지 않으면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학교로 전화를 걸어 남편이라며 자신의 아내를 찾아댔다고 했다.


심지어 시집살이도 정말 심했다. 지독히도. 당시에 어린 내가 봐도 심했다. 아빠가 허공에 쌍욕을 퍼붓고 더 이상 학생들 앞에 설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엄마는 시가 식구들인 고모와 할머니에게 이 사람 병원에 입원해야 할 것 같다고 말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자 고모와 할머니는 멀쩡한 3대 독자를 병신 만든 게 바로 너라며 엄마를 쥐 잡듯이 잡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정신분열증>이 아니라 <정신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 병에 걸린 사람은 사망선고받은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사회인으로서 구실을 못하는 상병신.



아빠는 말로만 듣던 3대 독자로 심지어 똑똑해서 그 시절 시골에서 중학교 때 도시로 유학도 갔다고 했다.  그런 귀한 아들이 정신병이라니 할머니와 고모는 절대 받아들이지 못했다.


문제는 엄한 데다 그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엄마가 아빠의 이상 행동이 감당이 안돼서 입원 동의를 해달라고 하자 집으로 찾아와 할머니는 우리 집 거실에 재수 더럽게 없다며 침을 뱉고, 엄마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고모는 날마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어린 우리까지 들먹이며 맞벌이라고 챙겨 줬더니 은혜도 모른다며 듣지도 보지 못한 쌍욕을 해댔다.


나는 아직도 그때 할머니에 맞서지 못하고 엄마를 지켜주지 못해 진짜 한이 남았다.

아마도 지금 내 나이랑 비슷했을 것이다. 아무리 교사였지만 지금 처우처럼 복지가 좋았던 게 아니었다.


이제 겨우 유치원 다니던 연년생 자매를 거두고 아픈 아빠를 살펴가며 학교에 소문나지는 않을까 엄마는 늘 맘 졸였다.



나라도 대신 엄마를 위해 말해주고 싶은데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몰랐다. 엄마는 그렇게 당할 때마다 이혼을 생각해서였는지 장롱 서랍 한 귀퉁이 할머니가 잡아채고 때릴 때마다 한 움큼씩 머리카락을 모아뒀었다.



엄마가 지금 알면 무척 속상해하겠지만, 7살이었던 나는 그 머리카락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엄마가 가여워 엄마가 집을 비우면 자주 그 장롱서랍을 열어 엄마의 빠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나는 아빠가 여전히 살아있지만 그를 추억해야만 한다.


내가 5살 즈음, 아빠는 한손으로 내 손을 잡고 방금 산 내 장난감은 반대편 손에 쥐었다. 우리는 신나는 걸음으로 노을 진 햇살을 뒤로하고 비탈진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아빠는 늘 주말 아침마다 신문을 정독 했는데 그런 아빠 옆에서 장난치는게 너무 좋았다. 아빠등에 올라타고 내리는 장난을 치며 우리 자매는 정신없이 웃어댔다.


아빠와의 행복한 기억을 누군가 묻는다면 슬프지만 이게 전부다.


나도 한 때 멀쩡했던 아빠가 있었던 여리고 작은 아이였다. 이제 딸 둘의 엄마이자 평안한 가정생활을 하니 그 약했던 아이가 불쑥불쑥 떠오른다.


세상을 잃은 것처럼 울고 있는 그때 그 소녀에게 달려가 다 괜찮아질 거라고 조금만 버티라고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두 팔 벌려 안아주고 싶다.


이제부터 이곳에 써내려 가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나의 오랜 치유의 기록이자, 어렸던 나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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