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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가봄 May 10. 2024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발 도와달란 간절한 몸부림의 일환으로 우리는 교회를 참 열심히 다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이라는 문구는 알고보면 참 잔인하다. 사람이 기댈 곳이 없고 마음이 황폐해지면 어딘가 강렬한 돌파구를 찾게 되는 것 같다. 붙잡을 지푸라기가 교회였다.


한참 먹고 싶은 게 많을 나이 13살 무렵, 나와 동생은 3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물만 먹는 금식 기도에도 동참한 적이 있다. 기도원 목사님은 우리 가족에게 금식하고 기도 하면 아팠던 몸이 회복되는 은사가 있을거라 했다.


생명줄인 밥도 안 먹고 기도를 하는 건  마치 강하게 떼쓰는 행동과 같아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긴급하고 더 간절히 여기 신다고 했다. 하루는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둘째 날 저녁부터 나는 현기증이 났다. 산 송장처럼 누워서 오감이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특히 후각이 무척이나 예민해졌다. 기도원 건물 아래층에 갈빗집이 있었는데 고소하고 달큼한 냄새에 취해서 흐릿 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냄새만 연신 들이켰다. 암막 커튼 때문에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보다 치킨.. 피자.. 짜장면 같은 당장 먹고 싶은 메뉴를 중얼거렸다.


하얀 콘크리트 벽에다가 힘 없는 손가락을 필기구 삼아 먹고 싶은 메뉴를 끄적이기도 했다.




기도가 제대로 나올 리 없었다. 첫날 에는 호기롭게 아빠를 위한 통성 기도가 절로 흘러나왔다.


내내 간절했던 우리 집의 미해결 문제였고 그게 해결되면 우리 가족은 행복이 보장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 삼일 째 되던 날은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기운이 없어 요강에다 싸고 싶었을 정도였으니 기도가 나올리 만무했다.


기도를 하려고 예배당에 앉으면 현기증이 나서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조차 없었다.


메마른 과일은 아무리 쥐어짜도 즙이 나오지 않는다.  금식 기도 첫날에 수도꼭지 처럼 콸콸 터지던 눈물의 기도는 시간이 갈수록 나오지 않았다.


금식기도 기간이 끝나고 보호식을 하며 말갛고 흰 찹쌀죽 같은 걸 먹는 교인을 볼 때가 있었는데 그의 첫 귀중한 식사를 빼앗아 통째로 벌컥벌컥 들이키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어린 우리에게는 고문이었다.


*출처: 10000recipe.com


금식 기도 마지막 날 늦은 오후,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도 없어 기도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목사님이 찾아와 내앞에 스케치북을 들이 미셨다.


다시 화목해진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색연필로 가족화를 그려보라는 것이었다. 새 하얀 도화지를 보는데 나도 모르게 화가났다.


지금이었으면 ‘당신 지금 사람 놀리냐’ 며 ‘색연필 들 힘도 없고 밥이나 가져오라’고 따박따박 따져 들었을 텐데 착해빠졌던 그때 나는 마지못해 그렸던 것 같다.


환하게 4명 모두 웃고 있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어거지로 그렸다. 그림을 보고 천국 같지 않냐고 웃으시던 목사님 얼굴이 생각이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교회에서 지냈던 기간 동안 나는 지옥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자녀들 모두 금식까지 시켜가며 간절히 기도한 배경에는 엄청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증세가 심각해진 아빠는 환청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아빠가 들린다는 내용은 대부분 본인 자신을 향한 비난이었던 것 같다. 자기 자신과의 지루한 싸움을 몇 년째 이어 나갔다.


잠깐씩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아빠는 상당히 우울해했던 것 같다. 이 병이 낫는다고 해도 10년 전 교직 생활을 끝으로 사회생활이 전무했던 아빠는 다시 사회로 나갈길이 없었다.


아빠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아있는 친구도 그리고 커리어도 돈도 없었다.


아이들과 부인은 욕만 안 했지 자기를 벌레 보듯 본다. 똑똑했던 당신이 정신 질환자라는 사실은 절대 인정하지 못했다.


그 당시 우리 자매는 아버지와 한집에 사는 걸 견디고 버티다 엄마에게 무릎 꿇고 빌었다. 제발 이혼해 줬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엄마만 결단을 내려주면 된다고.


이 끝이 안 보이는 고통을 우리는 못 견디겠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야말로 1차원 적인 절규였다.


엄마는 무릎 꿇은 나를 한참 바라만 보았다. 얼마 안 가 엄마는 아빠에게 갈라 서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아빠는 엄마가 자기를 버릴까봐 매우 불안해 했다.


며칠이 지났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데 누군가 우리 반 문을 드르륵 열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병원 이름을 듣고 뭔가 큰일이 생긴 것임을 짐작했다. 지역에서 가장 큰 대학병원이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가슴을 졸이며 도착한 그곳에는 엄마가 초조한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해서 자초지종을 묻자,


아빠가 기찻길에 가서 몸을 던졌다고 했다. 기차가 들어오기 직전 엎드려서 기차 밑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는데 등을 많이 다쳐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 이었다.


나는 그 순간 장애까지 얻어서 우리를 얼마나 괴롭게 할는지 그 두려움이 앞서 몸서리 쳤다.


걱정이 되거나 안타까움에 가슴이 미어지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슬프지 않은 내 자신이 고스란히 느껴져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다.


아빠는 수술이 잘 끝나고 등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이긴 하지만 옷만 입으면 티가 나지 않을만큼 멀쩡해졌다. 아빠가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학교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꼈다. 이게 진짜 천국 같았다.


나는 모태신앙 이다. 지금은 완전히 ‘못해 신앙인’ 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진짜 크리스천인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할 정도로 아예 기독교적인 삶과 동 떨어진 채로 살고 있다.


아!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를 가여히 여기셔서 지금 누리는 안온하고 평안한 삶이 준비 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그러나 노래란 걸 부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나는 그의 이름을 찬양했고 밥도 먹지 않고 기도했으며 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 회복을 부르짖었던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봐 주시기를 소망한다.


여기서 더 하라고 하면 이제는 참지 않고 정말 요목 조목 따져대고 싶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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