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리니 Jul 22. 2024

실장님 잘가요..

부제: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내가 이별을 고한 장소는 조금 뜬금없지만 차 안이었다. 심호흡을 열두 번도 더 가다듬었던 것 같다.


실장님에게 전화를 거는 순간은 연인에게 이별을 선고할 때보다 마음이 더 불안하고 두근거렸다. 그녀 없이도 이 일을 혼자서 잘할 수 있을지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인관 관계를 손절할 때 ‘손절하는 티’를 내면 안 된다는 명언이 있다. 맞다. 삶의 지혜가 담긴 이야기다.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일 적 으로든 사적으로든 친해진 누군가와 인연을 정리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특히 “내가 너를 정리한다.”는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면 안전한 이별이 되기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대놓고 불편하다 말하는 걸 못하는 충청도에서 태어나 빙빙 돌려 말하는 걸로 내 의견을 전달하면서 살아왔었다. 그러다 정 안되면 그제야 장황하고 최대한 구질구질하게 내 감정을 전달하는 타입이었다.


실장님에게 쌓이고 쌓인 불만 때문에 이별을 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업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한다든가 콘셉트를 바꾸려 한다든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 좋았을 것을 내 안의 불만이 임계치에 오르자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당신이 나를 너무 하대해요.’를 곧이곧대로 말하진 않았지만 10살 이상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법하게 전달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눈물이 다 났다.


지금의 연륜이라면 아마 조금 더 지혜롭고 평화로운 관계 개선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다.


그 때 실장님에게 나름의 <해고 통보>는 나에게 엄청난 용기였고 동시에 10년 묵은 체증이 모두 해결되는 듯한 통쾌한 느낌을 주었다.


앞으로의 모든 제작제품에 대한 1부터 100까지의 크고 작은 작업 과정과 공장 핸들링을 직접 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에 해방감이 찾아온 것 같았다.


함께한 세월이 채 2년이 안 되었다.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지만 봄부터 겨울상품을 4계절 전문가 밑에서 비싼 돈 내고 배웠다고 생각하면 투자라고 할 법하다.   


지금도 감사한 부분은 분명히 있다. 인간관계에서 양면성이란 이런 것 같다. 참고 견뎠을 때 얻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


그녀와의 시간은 나에게 크게 2가지를 배울 수 있게 해 주었다.

1.    의류 제작 시스템 대한 명확한 이해
2.    공장과 원단시장 그리고 단가 계산에 대한 이해

  

이 2가지를 자산으로 얻으니 두려움이 걷히고 뜬금없는 자신감도 생겼다.


어떤 식으로 제작을 하면 되는지 지도를 손에 넣은 느낌이었다. 이제야 반 전문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뻣뻣한 공장 사장님을 만나도 어떻게 미팅을 끌고 가야 할지 그들을 어떻게 내 식대로 요리하면 좋을지 감이 생겼다.  


이 시기 나의 제작기 커리어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히트제품도 처음으로 생겼다.

 

제품은 털이 복슬복슬하게 두터운 겨울 아동 점퍼였다. 당신 실장님과 손절하기 직전 만들었던 제품으로 제작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겨울 점퍼에 쓰이는 부자재(지퍼나 후드끈)와 원단에 대한 확실한 정보도 그때 차곡차곡 적립했다.


늘 아이디어가 없다고 나를 재촉했지만 막상 제작을 시도하려고 하면 그건 안 되는 제품이라고 말하던 그녀의 반대를 무릎 쓰고 시작했던 아이템이 성공했던 것이다.


그때는 ‘이거 안되면 더 이상 제작도 접자.’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터라 진득한 나의 고집에 실장님도 나를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제품은 두툼한 폴라폴리스와 뽀글이 원단을 양면으로 붙여서 쭈리원단의 후드를 댄 제품이었다.



당시 아동복 시장에서는 패딩이나 코트 말고 폴라폴리스의 원단으로 겨울 아우터가 잘 나오지 않았을 때다. 내가 만든 제품은 시장에서 거의 유일했다.


백화점이나 도매시장을 돌아봐도 똑같은 제품은 아예 없었으니 정말 어찌 보면 모험이었고 나 스스로 만든 독창적인 제품이었다.


출처: 파타고니아 키즈 뽀글이 점퍼



근래엔 파타고니아라는 브랜드에서 뽀글이 점퍼가 대유행을 하는 바람에 국내 유명 브랜드나 스포츠 브랜드에서 비슷한 제품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8년 전 내가 만든 제품을 본 사람들은 유니크하고 귀여운 제품이라고 생각했고 더군다나 세탁하기 힘든 패딩 제품대신에 너무 실용적인 제품이라 인기가 상당히 많았다. 가격도 한몫했던 것 같다.

(이 브런치 스토리가 구독자 300이 넘어가면 수줍지만 그 당시 제품 사진들도 공개해 보려고 한다.)


사진의 저 제품은 10~20만 원 정도에 팔리지만 내가 만들었던 제품은 5만 원이면 구매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제작비를 다 주고도 마진이 꽤 남았다.


심지어 제품 주문서가 오픈되자마자 주문이 밀려서 제작 가능수량을 넘는 일도 생겼다.


이때 버티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인생의 귀한 교훈을 몸으로 깨달았다.


사실은 저 제작 아이템은 내 머릿속이랑 연습장에만 연필로 슥슥 그어져 있었을 뿐 세상에 빛을 못 볼 뻔했다.


실장님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해서, 제작비가 많이 들어서, 아이를 키우면서 사업하는 게 어려워서 등등 내 속에서 갖은 핑계가 생성될 무렵에 가까스로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1-2년을 맨땅에 헤딩하느라 몸과 마음이 성한 곳이 없었다. 계속 없는 돈 짜내고 없는 힘을 짜내가며 버텨서 이제는 힘이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온몸으로 버둥거려 보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그 마지막 몸무림을 사람들은 훌륭한 춤이라고 봐준 것이다.


예전에는 충분히 좁은 지하 사무실에서도 택배작업이 가능했지만 이 시기부터는 택배를 혼자 하는 게 힘들 정도로 주문이 밀려들어 왔다. 단일 품목으로 이렇게 잘된 적이 처음이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하루에 매출이 100만 원도 아니고 1,000만 원이 넘어가는 숫자를 컴퓨터 화면으로 보니 도파민이 온몸에 돌기 시작했다.


남편은 퇴근하고 나서 밤늦게 지하 사무실로 와서 내가 택배 싸는 걸 도왔다.   


지하 사무실의 독수리 오 형제 사장님들은 갑자기 어느 날부터 미친 듯이 택배를 싸는 나를 보고 이러다 곧 빌딩 세우는 거 아니냐고 연신 부러움과 놀림이 섞인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제2의 [아가방] 이 되는 게 아니냐며 혹시나 대성하면 자신들을 잊지 말라고 우스운 당부를 하기도 했다.



분명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겠다는 희망과 에너지가 다시 샘솟기 시작한 게.


그리고 실장님에게 스스로 힘을 내어 이제 진짜 그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렇게 나와 실장님은 히트작으로 라스트 댄스를 거하게 추고 헤어졌다.



나에게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마진이 남았으니 그녀도 이걸로 어느 정도 벌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때문에 이별을 고하고 돌아서는 그녀에게 내 뒷모습이 그렇게 초라해 보이진 않았을 것 같아 다행이다.


나는 등을 완전히 반대로 돌리고 나서야 방향을 제대로 찾았다. 진짜 내 홀로서기가 시작된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