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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를 '보고서'

주관적인 리뷰 (스포 주의)

by 아론

세상 부러울 게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가진 만수(이병헌). 태어난 집을 다시 구매해 리모델링하고 2명의 아이를 둔 싱글맘(손예진)과 결혼해 25년 제지 회사에서 근속하며 '올해의 펄프맨'상까지 수상하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해고 통보를 받는다.


만수는 취업전선에 뛰어들고, 부족한 생활비를 메꾸기 위해 집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중고장터에 내놓는다. 모든 것을 잃어가는 만수는 억장이 무너지지만 어쩔수가 없다.


아내 미리는 함께 테니스를 치던 훤칠한 치과의사 진호(유연석)의 병원에서 치위생사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빛이 나는 그와 만수는 너무나도 대비가 된다. 마치 해질녘과 새벽녘만큼의 차이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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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취업 교육에 모인다. 단기 아르바이트는 고되다. 큰 계약을 성사시켜 유일하게 잘 나가는 '문 제지'에 찾아가 화장실 앞에 무릎 꿇지만 동갑내기 작업반장 선출(박희순)에게 수모만 겪는다. 그래도 '어쩔수가 없다.'


만수는 선출의 인스타그램을 염탐하지만 부러움만 가득하다. 선출을 미행하다 살해하려는 충동이 일지만 이성을 되찾는다. 머리 위로 던지려던 고추 화분을 사 온 후, '레드페퍼 컴퍼니'라는 이름으로 구인 공고를 낸다.


그렇게 받은 이력서들에서 본인보다 나은 2명을 찾는다. 범모(이성민)와 시조(차승원). 그들과 선출까지 제거하면 제지회사 반장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사람을 죽인다는 건 나쁜 일이지만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면 '어쩔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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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에 적힌 범모의 주택을 찾아가 몸을 숨긴 채 살피다 범모의 아내 아라(염혜란)의 외도를 목격한다. 범모를 가보로 전해지던 권총으로 살해한 뒤 몸을 숨긴다. 아라는 무능한 남편 범모를 마당에 묻어버린다.


두 번째 타깃 시조는 고등학생 딸을 키우며 신발가게에서 재기를 노린다. 만수는 그의 이력을 넌지시 말하며 통한다는 느낌을 들게 해 시조의 마음을 주무르며 외딴 도로로 시조를 유인한 뒤 살해해 트렁크에 싣는다.



집에서 묻으려고 땅을 파던 날, 아들이 생활비를 이유로 만수의 친구 동수의 휴대폰 가게를 도둑질하다 경찰서에 간다. 만수는 본인의 범행이 걸린 줄 알고 자수하려 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만수의 집을 사려고 했던 동수는 미리의 몸을 훑으며 불쾌함을 풍긴다. 일찍이 알고 있던 미리는 속옷을 벗으며 동수를 유혹하며 합의를 요구한다. 만수는 동수의 성매매를 일삼던 동수의 치부를 들추며 합의를 강요한다.


집에 돌아와 시체를 땅에 묻던 만수를 아들이 발견해 미리에게 말한다. 미리는 만수가 선출을 살해하던 날 진실을 알아챈다. 하지만 이 또한 '어쩔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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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수는 꿈에 그리던 문 제지의 작업반장이 된다. 해고되기 전에는 노동자들의 인권을 대변하던 그는, 스마트 공장의 유일한 인력으로 남고, 무참히 나무를 베는 장면으로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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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만들려면 나무를 베어야 한다. 내가 살려면 누군가 죽어야 한다. 제목부터 암시한 문장으로 모든 사건들이 전개된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어쩔수가 있다. 종이가 아니라 스크린을 쓰면 된다. 공존하면 된다. 어쩔수가 있다.


극 중 범행을 저지르는 대상들은 햇빛을 두려워한다. 눈부신 햇살이 비추면 눈을 가리고 숨는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범죄자다. 여성들은 방관하거나 그들의 범행을 동조한다. 성별과 햇빛의 유무로 범죄자와 피해라를 구분할 수 있다.


만수의 최종목표인 '문 제지' 또한 제지업계에만 종사하려는 인물들, 그 모든 것을 통틀어서 문제로 가득한 문제지로 암시한다. 이러한 복선들 외에도 배우들의 연기력과 카메라 앵글 및 구도 등의 요소들이 재밌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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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만수에게 해피엔딩이지만, 극 전체는 배드엔딩처럼 느껴졌다. 만수의 꿈은 처음과 끝에 이루어지고 과정은 처참하다. 그와 가족들, 연루된 모든 인물들은 파괴되고 찢겨 만수의 꿈으로 재탄생한다. 마치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들듯이.


다른 관람평들은 박찬욱 감독의 세계관이 너무 좁다던지, 그 만의 세계에 빠져있다는 등으로 악평을 한 글들을 많이 봤지만, 그럼에도 난 무척 흥미롭게 봤다. 다시 보게 된다면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과 복선이 내포되어 있을 듯한 작품성 있는 영화였다.


게다가 원작 소설이 따로 있으니, 감독을 탓하려면 각색과 연출에 대한 지적이 합당한 비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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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쿠키 영상은 없지만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장면들이 재밌었다. 출연진과 제작진들의 이름들이 낙인처럼 종이에 타이핑되는 장면을 클로즈업한 장면도 인상적이기에 보고 나가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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