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형 답사
1. 조선왕릉 알아보기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 경기도 여주
경기도 여주 능서면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군(群)으로, 조선 4대 왕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英陵)과 조선 17대 왕 효종과 인선왕후가 안장된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현재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인 문화재이다.
두 왕릉이 이름이 같아서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한자의 뜻으로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게 말해주었다.
세종의 영릉(英陵)에서 ‘영(英)’ 자는 ‘꽃부리’, ‘뛰어나다’라는 뜻인데, 이는 바로 세종대의 뛰어나고 찬란했던 과학기술과 문화 발전을 기억하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고, 효종의 영릉(寧陵)에서 ‘영(寧)’ 자를 쓴 이유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8년의 볼모생활로 고단했던 왕 효종이 편히 쉬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지어진 것이다.
영릉과 영릉은 매표소는 두 군데이나 이어지는 길이니, 시대순에 따라 세종의 영릉(英陵)과 먼저 그리고 효종의 영릉(寧陵) 순으로 답사해 보도록 하자.
2.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 『영릉(英陵)』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언해》 서문
조선 제4대 국왕으로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서 5년이 지난 1397년에 태어나 조선시대에 태어난 첫 임금이다. 31년의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치적을 남겨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남아 있으며, 역대 군주 가운데서도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호칭이 통용되는 군주이기도 하다.
1397년 당시 정안군이었던 태종 이방원과 정녕옹주였던 원경왕후 민 씨의 6남으로 태어났고, 위로는 다섯 명의 형이 있는데 맨 앞의 3명은 어린 시절 요절했기 때문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에 이은 사실상의 3남으로 자랐다. 원래 세자인 양녕대군을 대신하여 왕위를 물려받았으며 조선 초기 아버지 태종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왕이다.
조선의 성군, 세종대왕의 업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면에서 황희와 맹사성, 윤회, 김종서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러한 통치 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제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등의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이징옥, 최윤덕, 김종서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세종대왕은 과학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였는데,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 : 혼천의, 간의
- 시간 측정 기구 :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 강우량 측정 기구 : 측우기
- 하천 수위를 측정하는 기구 : 수표
- 인쇄술 : 금속활자 「갑인자」 주조
세종은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업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업과 관련된 책을 만들었다. 세종은 농부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듣고 조언을 구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는 농사법을 소개한 「농사직설」을 만들어서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펴내었지만 글을 몰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훈민정음은 언문으로 불리며 왕실과 민간에서 사용되다가 20세기 주시경 선생이 한글로 발전시켜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 쓰이고 있다.
조선 시대 궁중 음악은 향악, 당악, 아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향악은 우리나라의 전통 음악, 당악은 통일 신라부터 고려 시대까지 들어온 당나라 음악, 아악은 고려 때 송나라에서 전해진 궁중 음악이다. 잔치 때는 주로 향악과 당악이, 제사 때는 아악이 연주되었다. 그러니까 중국 음악이 우리 제사 때 사용된 것인데, 이에 세종은 아악을 정비하여 조선식 아악을 창제하게 하고 우리의 음악인 향악과 조화롭게 연주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명하였다. 세종의 명을 받은 박연은 아악을 정리하고 편종과 편경 등 아악기를 만들어 조선만의 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세종에서 세(世) 자는 '영토를 넓히는 등,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임금'에게 주는 묘호인데, 이것은 4군 6진을 개척한 업적, 대마도 정벌 등이 반영되어 올려진 것이다. 원래는 정인지 등이 학자들이 문치에 공덕이 있는 왕에게 올리는 묘호인 '문종(文宗)'으로 정하자 하였으나 나중에 그 묘호를 받게 되는 아들이 반대하면서 '4군 6진의 업적이 있으므로 세종으로 묘호를 정해야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그렇게 세종이 되었다.
소헌왕후는 태종 18년(1418)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이와 함께 경빈(敬嬪)이 되었다가 세종의 즉위하고 나서 왕비로 승봉(陞封)되었다.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한때 왕후의 지위가 위태로웠던 경우가 있었는데, 심온이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에 갔을 때의 있었던 일 때문이다. 그의 아우 심정이 병조판서 박습에게 국방 분야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하는 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는데, 박습이 이를 왕실에 고자질하여 심온과 심정 모두 사사(賜死)되었다. 이때 소헌왕후도 폐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세종을 내조한 공이 컸으므로 무사하였다. 세종과 슬하에는 8남 2녀를 두었는데, 문종과 세조가 소헌왕후의 소생이다.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매우 슬퍼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부처님과 그 가족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이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보』, 『법화경』 등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이를 한글로 옮겨 『석보상절』을 편찬하였다.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의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예종 1년(1469)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다.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으로 하고, 혼유석 2좌를 배치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세종 28년(1446)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 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예종 1년(1469)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3. 『석보상절(釋譜詳節)』
석보상절(釋譜詳節)은 조선 세종 28년(1446) 수양대군이 김수온 등과 함께 편찬, 번역한 불경 언해서이다. 총 24권 24 책이나 현재는 7권 7 책만이 남았다. 국립중앙도서관, 동국대학교 도서관,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었고, 보물 제52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책의 이름에서 석보(釋譜)는 석가모니의 전기(傳記)를 뜻하고, 상절(詳節)은 내용 중 중요한 것은 상세하게 서술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간략하게 줄인다는 의미이다. 『석보상절』은 불교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편찬했기에, 조선 전기 문학, 한글, 인쇄 등의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1446년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수양대군은 크게 충격을 받고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중국 양나라의 승우(僧祐)가 지은 석가보(釋迦譜)와 당나라의 도선(道宣)이 지은 석가씨보(釋迦氏譜) 등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들을 참조하여 모은 후 분류, 편철하여 처음 석보를 제작하여 어머니의 제단에 올렸다. 이를 본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석보를 완성하라는 명을 내리자, 신미, 김수온 등과 함께 기존 석보에 증수석가보, 아미타경, 무량수경, 지장경, 법화경 등의 내용을 추가하고 원문을 한글로 언해한 것이 지금 전해지는 석보상절이다.
『석보상절』에서는 석가의 전생으로부터 탄생‚ 수행‚ 득도‚ 교화 등 전 생애를 서술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을 여덟 개로 구분하여 팔상(八相)이라고 하는데, 『석보상절』은 이 순서를 따르고 있다.
도솔내의(兜率來儀, 도솔에 온 일)
비람강생(毘藍降生, 남비니원에 탄생한 일)
사문유관(四門遊觀, 출가 전 태자 때 인생의 네 가지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 일)
유성출가(逾城出家, 성을 넘어 집을 나간 일)
설산수도(雪山修道, 눈 덮인 산에서 도를 닦은 일)
수하항마(樹下降魔, 나무 밑에서 악마를 항복시킨 일)
녹원전법(鹿苑轉法, 녹야원에서 설법을 한 일)
쌍림열반(雙林涅槃, 쌍림에서 열반에 든 일)
그리고 세종이 석보상절을 읽어본 후 찬가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후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쳐 『월인석보』를 편찬했다.
4.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 『영릉(寧陵)』
효종은 조선의 제17대 국왕으로,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자는 북벌론으로 잘 알려진 왕이며, 10년의 재위 기간 동안 조선 중흥의 기틀을 다진 왕이기도 하다.
광해군 11년(1619)에 능양군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인조 4년(1626) 8살이 되던 해에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봉해진다. 병자호란 때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인질)로 잡혀 끌려가게 된다. 볼모로 청나라 수도 심양에 있는 동안, 청나라가 산해관과 서역을 대대적으로 치 칠 때 소현세자에게 동행을 요구하였으나 자신이 형을 대신해 가겠다고 할 정도로 당시 세자였던 형을 성심성의껏 지켰다.
인조 23년(1645), 고국으로 귀국했는데 그로부터 1개월 뒤 형인 소현세자가 죽는 바람에 그의 뒤를 이어 세자에 책봉되었고, 인조 27년(1649) 아버지 인조가 승하하자 다음날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조정의 배청(排淸)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 등의 친청파를 파직시키고,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대청 강경파를 중용해 은밀히 북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김자점 등의 친청 세력이 역관 이형장을 통해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알림으로써 청의 간섭을 유도함에 따라 즉위 초기에는 적극적인 군사 계획을 펼 수 없었다.
효종 2년(1651)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의 죽음은 북벌계획을 추진시켜 나가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에 친청파에 대한 사림세력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고 그해 12월에는 조귀인옥사(趙貴人獄事)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다.
이후에도 계속하여서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위하여 군제의 개편, 군사 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그러나 청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1654년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충돌 사건이 일어나자 오히려 청의 강요로 나선정벌을 2회 출정하기도 하였다. 1659년 5월 효종이 종기의 악화로 인해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북벌도 흐지부지 일단락되었다.
승하한 후 장례 절차에도 문제가 생겼는데, 효종의 시신을 넣기 위해 관을 준비해 왔는데, 어깨가 너무 넓어 관이 맞지 않았다. 조선 시대의 왕의 장례 절차는 왕이 즉위하자마자 관을 짜고, 왕이 승하하기 전까지 매년 옻칠을 덧칠해서 보관하는 절차로 시작한다.
실록에 의하면 송시열이 "효자는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 (부모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효심을 보이는 법"이라고 주장,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 시신이 부패하면서 부풀어 올라 관이 맞지 않았다고도 한다. 어쨌든 널빤지를 잇대어서 왕의 관을 늘리는 초유의 일이 생겼으며, 옻칠을 더하여 널빤지를 이은 자국을 감추도록 했다. 왕의 몸에 맞는 관을 만들 널판이 없어 덧댄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기 힘든 일이지만, 왕이 즉위하자마자 미리 관을 만드는 당시 절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효종께서는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에 납시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아직도 저승전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16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정조실록 28권
그리고 효종이 죽은 뒤 조선 역사상 가장 치열한 사상 논쟁인 예송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인선왕후(仁宣王后)는 효종의 정실 왕비이자 현종의 어머니, 그리고 숙종의 친할머니이다. 위로는 인조와 인열왕후의 둘째 며느리이다.
인조 9년(1631) 봉림대군과 혼인을 올려 풍안부부인이 되었고, 병자호란 후 남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서 8년간의 볼모 생활을 했으며, 돌아온 후에 남편 봉림대군이 다음 후계자인 세자가 되면서 세자빈이 되었다.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훗날 현종(顯宗)이 되는 이연을 낳았다. 인조 27년(1649)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조선의 왕비들 가운데 유일하게 타국 생활을 해본 왕비이다.
인선왕후 사망 당시 인조의 계비로서 자신보다 6살 어린 시어머니였던 자의대비(장렬왕후 조 씨)가 여전히 아직도 생존해 있던 상황이라, 남편인 효종의 사망 이후 제기되었던 예송논쟁이 또다시 불거졌고, 결국 인선왕후의 승하는 제2차 예송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영릉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동원상하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상하로 조성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할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껴가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영릉(寧陵)이 조선 최초이다.
왕릉의 봉분 주위로는 곡장이 설치되어 있으나 왕비의 능에는 곡장이 없어 두 능이 한 영역 안에 있음을 표시해주고 있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이 없으며 난간석의 기둥에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놓았다. 이는 간소화된 능제로서, 세조 광릉 이후 사라졌던 조선 초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이 성종의 선릉에서 다시 나타났다가, 이곳 효종의 영릉에서부터 없어진 것이다. 효종대왕 영릉의 특이한 점은 금천교가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으로 가는 참도의 중간에 위치 해있다.
젊은 시절 타국 청나라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온 효종과 인선왕후가 여기 영릉에서는 편안하게 쉬기를 바라는 마음의 영릉(寧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