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형 답사
1. 조선왕릉 알아보기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 서울시 노원구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군(群)으로,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안장된 태릉(泰陵)과, 조선 제13대 왕 명종과 인순왕후가 함께 잠든 강릉(宣陵)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현재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인 문화재이다.
주변에는 태릉선수촌과 삼육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육군사관학교가 있다. 태릉에서 입장권을 발권하여 태릉을 관람한 후 강릉으로 가려면 해당 입장권을 들고 강릉 매표소에서 보여 주어야 한다. 강릉 입구는 삼육대학교 정문 바로 옆에 붙어있다.
태릉은 세조의 광릉, 성종의 선릉, 신덕왕후의 정릉, 명성황후가 처음에 묻혀 있었던 홍릉 등과 더불어 지명화 된 조선왕릉 중 하나이다.
문정왕후와 명종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이니, 이번 답사는 어머니가 계신 태릉 먼저 갔다가 아들이 잠들어 있는 강릉으로 가보도록 하자.
2. 문정왕후의 능, 『태릉(泰陵)』
문정왕후 윤 씨는 연산군 7년(1501)에 태어났다. 1515년에 중종의 두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517년 왕비로 책봉된다. 당시 장경왕후의 아들인 인종이 왕세자로 책봉된 가운데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훗날의 명종)을 낳자, 인종을 지지하는 대윤(大尹)과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소윤(小尹) 간의 권력 싸움이 있었다.
이후 1544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이 정권을 잡았으나,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승하하고 경원대군(명종)이 12살에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소윤이 정권을 잡았다. 소윤은 의도적으로 대윤을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윤 및 사림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국은 불안정하여 매관매직이 빈번하였고,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8년의 수렴청정을 끝내고 명종이 친정하였으나, 실질적인 권세는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그 후 명종 20년(1565)에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명종 2년(1547) 경기 광주 양재역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이 권세를 휘둘러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보가 붙게 되었다. 여기서 여왕은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게 된 문정왕후를 일컬은 것이다. 이 벽보를 계기로 당시 학계와 정계에는 을사사화에 이은 큰 피바람이 몰아닥쳤다. 이와 같이 문정왕후와 문정왕후의 형제들인 윤원형, 윤원로는 집권 초기 자신의 반대파를 유배 보내거나 죽이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였다. 문정왕후 집권 시의 정치가 선비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는 당시의 대 유학자 조식이 그에게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에 잘 드러나 있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재앙과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이러한 직설적인 상소에도 조식은 무사하였다. 그러나 당대 문정왕후에 대한 언급은 금기가 될 정도로 문정왕후는 막대한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정왕후는 승과를 부활시키고, 승려 보우를 가까이하는 등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1550년 봉은사에 선종을 두고, 봉선사에는 교종을 두게 하여 선종과 교종을 모두 부활시켰다. 한편 윤원형, 상진과 함께 300여 사찰을 국가 공인 사찰로 지정하고,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년 동안 4,000여 명의 승려를 뽑는 한편, 승과시(僧科試)를 부활시켜 휴정(서산대사), 유정(사명대사) 등을 발탁하였다.
그리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그를 병조판서에 임명하는 바람에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또한 오라비의 첩이지만 같은 불교 신자이기도 했던 정난정을 아꼈다. 하지만 이는 성리학자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고 사후 그녀에 대한 악평의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문정왕후 사후 보우가 요승으로 몰려 귀양 갔다 살해당하는 등 불교는 다시 탄압받게 된다. 또한 윤원형은 실각당했으나 그녀의 친정 동기라 하여 목숨만은 보전하였다. 그러나 언관들은 윤원형 일파에 대한 탄핵을 계속 요구하였고 윤원형과 정난정은 결국 자결하게 된다. 문정왕후는 죽은 뒤 남편 중종의 능침 옆에 안장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결국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릉리(현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泰陵)에 홀로 안장되었다.
태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 윤 씨의 능으로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능침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능제를 따르고 있어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에는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을 새겼고, 만석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조성할 때 십이지신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인데, 태릉을 시작으로 십이지신상과 문자를 함께 새기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밖에 석양, 석호,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을 봉분 주위와 앞에 배치하였다. 특히 문석인과 무석인의 귓불에 귀고리 구멍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능침 아래에는 홍살문, 판위, 향·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었으며, 정자각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94년에 복원하였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선릉, 정릉과 마찬가지로 태릉과 강릉에도 왜적들에 의해 능이 파헤쳐졌다는 기록이 있다.
2.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 『강릉(康陵)』
조선의 13대 왕인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 씨의 아들로 중종 29년(1534)에 태어났다. 중종 34년(1539)에 경원대군에 책봉되었고, 1545년 이복형인 인종의 유명(遺命)으로 왕위에 올랐다.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에 모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수렴청정 기간 중에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등을 계기로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과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왕권은 실추되고 외척 일족의 수탈로 민생이 피폐하여 사회가 불안하였으며, 거듭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런 상황에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명종 8년(1553) 친정 선포 후, 외척을 견제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선정을 펴보려 하였으나, 소윤과 문정왕후의 권세에 눌려 뜻을 펴보지 못하였다. 명종 18년(1563) 외아들인 순회세자의 급서와 명종 20년(1565)에 문정왕후의 장례를 치른 후 명종 22년(1567)에 경복궁 양심당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을 홍길동, 장길산 그리고 임꺽정으로 꼽았다. 이 중 임꺽정은 16세기 중반 명종 재위 시에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도둑으로 양주의 백정 출신이다. 자신의 천한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도둑질을 일삼다가 훔친 곡식 등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줘 의적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명종 대에 정치적인 혼란과 흉년이 이어지는 데다, 관리들의 타락과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하자, 세력을 모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들을 빈민에게 나눠주며 의적 행각을 벌였다. 명종 14년(1559)에는 개성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등 과감하게 행동반경을 넓혔다가 참모와 가족들이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임꺽정 일당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신의 평이 『명종실록』에 실려 있다.
盜賊之熾發, 由於守令之掊克, 守令之掊克, 由於宰相之不廉. 今之宰相, 貪汚成風, 不知紀極. 是以守令剝民膏血, 以事權要, 啖豚咀雞, 無所不至, 而民窮無告, 其勢不爲盜, 則無以資生, 故相率而自投於死亡之地, 以僥倖刦奪爲事. 是豈民之性也哉? 苟朝廷淸明, 而無惟貨其吉之心, 守令皆得如龔, 黃者而任之, 則帶釰者買犢而歸農矣. 安有殺越無忌, 如此之甚者乎? 不然, 徒欲率兵趕捕, 則抑恐隨捕隨起, 將不勝其捕矣.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 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랴? 조정이 청명하여 재물만을 탐하지 않고 어진 이를 수령으로 가려 뽑는다면 칼을 든 도적들이 송아지를 사서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려 추적하여 붙잡으려고만 한다면 붙잡은 대로 또 뒤따라 일어나 장차엔 다 붙잡지 못할 것이다.
『명종실록』 명종 14년(1558년) 3월 27일
인순왕후 심 씨는 중종 27년(1532) 태어났다. 중종 37년(1542)에 경원대군과 결혼하여 부부인(府夫人)에 되었으며, 154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명종 6년(1551)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명종 18년(1563))에 어린 나이로 급서하는 비운을 겪었다. 1567년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후사가 없어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선조)을 양자로 입적시켜 대통을 잇게 하였다.
선조가 16세에 즉위하자 모후가 되는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8개월 만에 물러났다. 그 후 1575년 창경궁 통명전에서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왕이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미처 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의 결정권은 대비에게 넘어간다. 대비는 사적으로는 새로 왕이 될 자의 어머니이며, 선왕의 부인이다. 비록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이지만 대비는 국모로서의 권한과 함께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지위를 갖게 된다.
인순왕후는 명종이 임종을 맞을 당시 양심당의 소침 병풍 뒤에서 명종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명종과 인순왕후 둘 사이에는 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탓에 명종의 뒤를 이을 자가 없었다. 그러나 생전에 명종은 자신의 이복형인 덕흥군(중종과 창빈 안 씨의 아들)의 아들 하성군을 의중에 두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명종의 의중을 알고 있었던 인순왕후는 당시 16세이던 하성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14대 왕 선조이다.
강릉(康陵)은 조선 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 씨의 능으로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명종, 오른쪽이 인순왕후의 능이다. 전체적인 능침은 문정왕후의 태릉과 같은 형태로 조성하여,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고,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석마, 문무석인 등을 배치하였다. 능침아래에는 홍살문, 향·어로, 정자각, 비각이 있고, 정자각 왼편에는 둥근 어정(御井)이 있다. 어정이란 왕이 마실 물을 위해 판 우물을 말한다. 광릉, 숭릉에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