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덕왕후의 능, 『정릉(貞陵)』 - 서울시 성북구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으로 현재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인 문화재이다. 신덕왕후는 조선 개국 이후 최초의 왕비였지만, 두 아들을 태조 7년(1398) 왕자의 난으로 모두 잃은 비운의 여성이다.
신덕왕후 강 씨의 집안은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향처(鄕妻,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와 경처(京妻,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는 고려의 풍습에 따라 신덕왕후는 태조의 경처가 되어 무안대군인 ‘방번’과, 의안대군 ‘방석’, 경순공주까지 2남 1녀를 낳았다.
태조는 신덕왕후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 틔우게 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어느 날, 말을 타고 사냥을 하던 중 목이 매우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아리따운 그 고을의 처자에게 물을 청하였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을 띄워 그에게 건네주었다. 태조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처자는 “갈증이 심하여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태조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하여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으나 태조의 향처 한 씨가 이미 조선 개국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태조 재위 시절 자신의 둘째 아들(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등 지지 기반을 닦았으나 이는 훗날에 일어날 왕자의 난의 씨앗이 되었다. 태조 5년(1396)에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시절인 광무 3년(1899)에 신덕고황후로 추존되었다.
신덕왕후가 죽은 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아들들인 이방석과 이방번은 끝내 이복형 이방원에 의해 살해당했고, 딸 경순공주의 남편으로 사위인 흥안군 이제도 참살당하면서 신덕왕후의 실질적인 혈통은 모조리 끊기게 되었다.
신덕왕후 강 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직접 서운관(書雲觀) 관리들을 데리고 다니며 능지를 물색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언덕과 산이 감싸서 풍수가 길하게 호응하는’ 길지인 취현방(聚賢坊) 북쪽 언덕에 정릉을 조성하였고, 그 동쪽에는 원찰(願刹)인 흥천사(興天寺)도 건립했다. 신덕왕후의 능과 원찰을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도성 안에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태조는 매일 이른 새벽 흥천사에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종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아침 수라상을 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영국대사관 지리인데, 서울시 중구 ‘정동’은 이렇게 생겨난 지명이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신덕왕후와 관련한 제도, 의례 등을 모두 바꾸었다. 먼저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동소문(혜화문) 밖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성북구 정릉 자리이다. 또한 무덤의 봉분을 없애고 평지를 만들어 흔적이 남지 않도록 했으며, 능묘에 있던 석물들은 백성들이 밟고 지나다니도록 청계천 광통교 보수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무덤을 수호하던 법당인 흥천사를 헐어 버렸다. 게다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기까지 한다. 이후 신덕왕후는 현종 10년(1669) 왕비로 복위되었다. 약 260년간 거의 폐묘나 다름없던 정릉도 그때부터 왕릉으로서의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그리도 미워하여 능묘마저 허물어 멀리 옮겨버렸지만, 정릉의 사계는 그 원한이 무색할 만큼 아름답고 그윽하다.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릉의 소나무와 참나무는 인간의 한낱 미움과 원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정릉은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 강 씨의 능으로 단릉 형식으로, 능침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를 배치하였다.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이 조성 당시의 것이며 나머지 석물은 현종 대에 다시 조성되었다. 정릉의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가장 오래된 석물이어서 예술적 가치가 높다.
능침 아래에는 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있고, 진입 공간에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 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 양옆으로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늠름하게 서 있다.
2.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 『의릉(懿陵)』 - 서울시 성북구
경종은 조선의 20대 왕으로 숙종과 희빈 장 씨의 아들로 숙종 14년(1688)에 창덕궁 취선당에서 태어났다. 경종이 탄생으로 인해 서인과 남인의 대립인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정권이 교체되기도 하였다. 숙종 15년(1689) 원자로 책봉된 후 그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숙종 27년(1701)에는 무고의 옥(인현왕후 저주 사건)으로 어머니 장 씨의 죽음을 목격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720년에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재위 4년 뒤인 1724년에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의붓형이다.
경종 즉위 1년에서 2년 사이 ‘신임사화’가 일어났는데, 이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대립으로 신축(辛丑)년과 임인(壬寅)년 양년에 일어났다 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하고, 일명 임인옥(壬寅獄)이라고도 한다.
경종은 몸이 허약하고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노론 세력은 경종에게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였다. 그에 따라 경종 1년(1721) 왕의 의붓동생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노론 네 대신은 경종의 병을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주장하였고 경종은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자 소론 세력의 조태구, 유봉휘 등이 부당함을 상소함에 따라 대리청정이 취소되었고, 이 문제를 경종에 대한 불충으로 몰아 노론을 탄핵하였고, 이후 목호룡이 고변사건을 일으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네 대신을 삭탈관직하고 유배시키게 된다. 경종 1년(1721)에 있었던 이 사건이 신축옥사(辛丑獄事)이다.
신축옥사로 노론의 네 대신이 유배형에 처해지자 모처럼 실권을 장악한 소론은 기세를 모아 목호룡(睦虎龍) 등을 시켜 노론이 삼수역(三守逆)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고변하였다. 이 고변은 상당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고 소론은 이 기회에 노론을 완전히 실각시키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노론이 모의했다고 고변된 사건의 진상은 다소 모호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이미 유배를 떠난 노론 4 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을 처형하였고 노론 170여 명이 유배 또는 문초를 받았다. 이 사건이 경종 2년(1722)에 있었던 임인옥사(壬寅獄事)이다. 이 역모 사건은 영조 때에 이르러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고 처형당한 대신들은 신원되었다.
2015년 개봉한 한국영화 『사도』에서 영조와 사도세자가 종묘를 참배하는 장면에서 경종이 언급되는데,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이 어른은 나의 형님이신 경종대왕이시다. 사람들은 내가 이 어른을 독살했다고들 한다"며 영조의 정통성 콤플렉스를 나타내는 장면에 등장한다. 영화의 중반부에는 고문당하던 죄인이 영조에게 "경종대왕을 독살한 당신이 어찌 왕이란 말이오" 라며 항의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에 대한 영조의 대답이 흥미로운데 "25년 동안 지겹지도 않냐"며 한숨을 쉬다가 그 죄인의 입을 찢어버린다.
경종의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 씨는 숙종 44년(1718) 왕세자빈 심 씨(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영조가 즉위하자 경순왕대비가 되었으며, 영조 6년(1730)에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의왕후가 중전 시절 경종이 후사가 없자 종친 중에서 어린아이를 입양하여 후사를 정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궁중의 일각에서는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의 아들 관석을 입양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경종 1년(1721)에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경종이 아무리 병약하다고는 하나 즉위 1년 만에 왕세제를 책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노론은 소론과의 알력 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해 왕세제 책봉뿐 아니라 대리 청청까지 주장하였고, 계속적인 정권 다툼과 숙청의 바람을 몰고 왔다. 이러한 어지러운 정국의 한가운데에, 결국 선의왕후의 양자 입양은 무산되었다.
경종 4년(1724)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양주 중랑포 천장산 언덕에 능을 먼저 조성하였다. 그 후 영조 6년(1730) 선의왕후 어 씨가 세상을 떠나자, 의릉 동강 하혈(下穴)에 능을 조성하였다. 의릉은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능역 내에 있어서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하였다. 이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뀐 후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1996년에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고,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외래수종 제거, 전통수종 식재, 인공연못 성토, 금천교 복원 등 기초적인 의릉 능제 복원 정비공사를 마쳤다.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 씨의 능이다. 의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이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릉의 형식으로, 곡장을 두른 위의 봉분이 경종의 능, 곡장을 두르지 않은 아래의 봉분이 선의왕후의 능이다. 이러한 형식은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인 이유이다.
능침은 두 봉분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장명등, 혼유석, 석양, 석호, 석마, 문무석인 등을 배치하였다. 경종의 능침에 배치된 망주석 세호는 왼쪽은 위를 향해 올라가 있고 오른쪽은 아래를 향해 내려가 있으나, 선의왕후의 능침은 반대로 조각되어 있다. 특히 경종의 능침 무석인의 뒷면에는 짐승 가죽을 나타내기 위해 꼬리가 말린 것을 조각하였고, 선의왕후의 능침 석호는 꼬리가 등 뒤로 올라가게 하는 등 재미있게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