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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Mar 29. 2024

27.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王陵) - 파주 삼릉

1박 2일형 답사


1. 조선왕릉 알아보기 삼릉(三稜)』 경기도 파주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위치한 조선왕릉 군(群)으로 사적 제205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총 3개의 능이 자리 잡고 있어서 공순영릉(恭順永陵)이라고도 불린다.      


 총 3개의 왕릉이 위치한 나름 큰 왕릉군이지만, 2개의 능은 젊은 나이에 일찍 요절하였던 왕비의 능(둘 다 한명회의 딸), 다른 1개의 능은 추존왕과 왕비를 모아놓은 능이고, 안장되어 있는 무덤의 주인들이 역사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인물들이다 보니 동구릉이나 서오릉, 서삼릉 등의 왕릉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왕릉군이다. 


2. 예종의 비 장순왕후의 능공릉(恭陵)     

 장순왕후는 조선 8대 국왕 예종의 1번째 왕비이자, 어린 나이로 요절한 인성대군의 어머니이며, 당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인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 씨의 딸이다. 외조부인 민대생은 고려의 명신이었던 대제학 문인공 민지의 5대손이었다.     


 한 씨의 아버지 한명회는 과거 급제가 아닌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말단이었기 때문에, 사대부들에게 무시당하고 멸시당했으니 한 씨의 어린 시절도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왕족이던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어 계유정난을 성공시키자 한 씨의 인생은 180도 달라진다. 

     

 한 씨는 세조 6년(1460), 15살에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되어 당시 세자였던 이황(예종)과 가례를 올리고 부부가 되었으니 이때 나이가 16살이었다. 당대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한 씨는 정숙한 성품에 아름다운 용모로 시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세조 7년(1461) 원손을 낳았으나, 같은 해 산후병으로 향년 17세에 요절하였다.     


 세조는 총애하던 며느리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온순하고 너그럽고 아름다운 것'을 장(章), '유순하고 어질고 자혜로운 것'을 순(順)이라 하여 세자빈 한 씨에게 '장순(章順)'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장순빈(章順嬪)'으로 삼았다. 훗날 장순왕후의 제부이자 시조카인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를 장순왕후로 추존했다.     


 공릉은 조선 8대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 한 씨의 능으로 단릉 형식이며,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다. 이후 성종 1년(1470) 장순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공릉이라 하였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있는 향로는 직선축이 아닌 절선축으로 조성되었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 1쌍씩 배치하였다. 조선 전기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기 때문에 망주석을 생략하였고, 봉분을 크게 조성하였다.

눈 오는 날 공릉의 전경,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홀로 쓸쓸히 누워 있는 장순왕후의 능이 보인다.

3. 성종의 비 공혜왕후의 능순릉(順陵)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의 1번째 왕비(王妃)이며, 영의정이자 상당부원군인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 씨의 막내딸로 세조 2년(1456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언니 중 한 명은 예종의 첫 번째 왕비인 장순왕후 한 씨이다.     

 세조 13년(1467)에 자을산군(성종)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부인에 봉해졌으며, 1469년에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종과의 사이에서는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성종 5년(1474)에 창덕궁 구현전에서 1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성종은 공경(恭敬)하고 '유순하게 윗사람을 섬김을 공(恭)이라'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을 혜(惠)라' 하여 공혜왕후(恭惠王后)라는 시호를 올렸으며, 연산군의 재위 기간인 연산군 4년(1498년)에는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존호가 더해지기도 했다. 종묘 정전에 공혜왕후의 신위가 성종과 함께 나란히 모셔져 있다.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 씨의 능이다. 파주 삼릉 내에 있는 3기의 능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한 능인데, 공혜왕후가 중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수라간,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에는 한 기의 능표석이 있는데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2쌍씩 배치하였다.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을 짓고 있다.

파주 삼릉 내에 있는 3기의 능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한 능인데 이는 공혜왕후가 중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4. 추존 진종과 효순왕후의 능영릉(永陵)     

 진종소황제는 영조의 장남으로 숙종 45년(1719)에 창의궁에서 태어났다. 1724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가 이듬해인 영조 1년(1725)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영조 4년(1728)에 창경궁 진수당에서 9세로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병에 걸려 어린 나이에 단명했는데 이때 영조는 친히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세자는 '효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영조는 왕세자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영조 52년(1776)에 영조의 명으로 이복동생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양자로 입적이 되자 효장승통세자(孝章承統世子)라 하였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그 후 융희 2년(1908)에 진종소황제로 추존되었다.     


 영조는 효장세자 사후 7년 뒤에야 겨우 다시 아들을 얻었는데, 이 어렵게 본 아들이 그 유명한 사도세자이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으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이산(정조)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명색이 죄인인 사도세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세손을 이미 오래전 죽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만든 뒤에야 후계자로 삼았다. 이는 세손이 역적의 아들이라 하여 노론의 집요한 공격을 당할 것을 걱정한 영조가 취한 조치이다. 이 때문에 정조는 죽을 때까지 친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했지만, 양부인 효장세자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국왕으로 추존하였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묘호는 진종(眞宗)이라 하였다. 효장세자의 비인 현빈 조 씨 역시 남편이 추존되자 효순왕후(孝順王后)가 되었다.      


 효순왕후는 효장세자의 부인으로, 1727년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빈으로 간택되었으나, 바로 이듬해 세자가 요절하면서 14살에 과부가 되었다. 1735년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영조로부터 현빈(賢嬪)이라는 빈호(嬪號)를 받았다. 남편 효장세자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요절하면서 본인도 평생을 세자빈의 신분으로 살았으나, 이후 양아들로 입적된 정조가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면서 그녀 역시 사후 왕후로 추존되었다. 일찍 남편을 잃은 현빈 본인도 남편처럼 병을 얻어 36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영릉은 추존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 조 씨의 능이다. 영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진종소황제, 오른쪽이 효순소황후의 능이다.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검소하게 조성되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영릉의 비각은 총 2개로 비각 안에는 세 기의 능표석이 있다. 1비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비, 2비는 진종대왕(眞宗大王)의 비, 3비는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의 비로 진종이 추존될 때마다 능표석을 새로 세웠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한 쌍씩 배치하였다. 문석인은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 부근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새겨져 있다.

영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진종소황제, 오른쪽이 효순소황후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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