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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Mar 13. 2024

25.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王陵) - 남양주 광릉

『大小人員皆下馬』 '대·소인 모두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문구로 조선왕릉 중 현존하는 유일한 하마비(下馬碑)이다.


1.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광릉(光陵)』 경기도 남양주     


 광릉은 조선 7대 왕인 세조와 정희왕후 윤 씨의 능으로 사적 제19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인 문화재이다.      


 세조는 아버지 세종이 충녕대군이었던 시절 차남으로 태어났다. 입궐한 후 1428년 대군에 봉해졌고, 진평대군 → 함평대군 → 진양대군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최종적으로 받은 군호는 수양대군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수양대군이라 흔히 불리지만, 왕자 시절은 진양대군으로 불린 시절이 제일 길었다. 수양으로 군호가 바뀐 건 한글 반포 1년 전인 세종 27년(1445)이고, 왕위에 오를 때까지 10년 동안 수양대군으로 불리게 된다. 휘나 묘호보다도 왕자 시절의 군호가 더 익숙한 임금이다.      


 아버지 성군에게서 나온 무인 기질의 아들로 평가하지만 세조는 문장에도 뛰어났다. 활쏘기를 좋아했음에도 '책을 다 읽기 전에는 활을 잡지 않겠다'라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다만 아버지와 형이 워낙 걸출해서 상대적으로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세종 치세 시절에는 세종의 아들 가운데 문종 다음으로 공이 많은 아들로 알려진 세조이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고, 석가모니의 공덕을 기록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한글로 지어 아버지에게 바치자, 세종은 감동하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시작

세조는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전 『경국대전』 편찬을 명하여 시작하였다. 경국대전의 한자들을 살펴보면, "경국(經國)"은 "나라를 다스린다"라는 뜻이고, "대전(大典)"은 "큰 법"이라는 뜻이라서 "경국대전"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을 뜻한다. 이미 세조 치세에 호전과 형전은 이미 완성이 되었으나 그 외 법전에 대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치느라 24년이 지나 세조의 손자인 성종 즉위 15년에야 최종적으로 반포될 수 있었다.     

직전법(職田法실시

세조 12년 기존의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 현직 관료에게 모두 사전(私田)과 급료를 지급하는 과전제를 폐하고 직전법을 실시,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의 재정을 크게 늘렸다. 세조 이전까지는 은퇴, 퇴직한 사람과 그 유가족에게도 현직 관료와 똑같이 토지를 주었으나 이로 인해 조선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자 세조 12년부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직전법을 밀어붙였으며, 자신이 아끼던 공신들에게도 직전법만은 철저히 따르게 했다. 이때 전직 관료를 토지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고, 관료의 과부나 자녀 등 유가족에게 지급하던 수신전(守信田), 휼양전(恤養田) 등도 폐지하였으며 그 지급액도 과전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잠실(蠶室)

세조는 궁중에 잠실을 두어 왕비와 세자빈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 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 등의 농서를 농민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훈민정음으로 번역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현재의 ‘잠실’이란 지명은 세조가 만들어 냈는데, 왕족에게 누에치기를 널리 하게 하였는데 그때 누에를 키우던 곳이 지금의 잠실이 되었다.     


불교장려

세조는 불교를 숭상하여 세조 7년(1461)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 김수온 등에게 법화경, 금강경 등 불경을 간행하게 하는 한편, 대장경 50권을 찍어내기도 하였다. 이후 몇몇 훈구파 공신들과 사림파 신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각사와 신륵사, 수종사 등의 중건을 지원하였으며, 기타 강원도의 월정사, 상원사, 경기도 파주의 보광사, 경기도 남양주의 수종사와 양평의 용문사, 합천의 해인사, 금강산의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직접 방문하여 시주하고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억불정책의 조선 사회이지만 이 시기만큼은 불교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면리제 시행

세조는 행정 구역인 ‘면리제’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면리제는 한국의 땅과 마을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연구하여 만든 지방 행정 체계로, 조선과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주요 행정 구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어쨌든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무리한 군주이나, 세조에 대한 평가에서는 조카의 왕위 찬탈이라는 정치적 정당성의 부재가 항상 따라다닌다.     

 정희왕후 윤 씨는 세종 10년(1428) 수양대군(당시 진평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으며, 1455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 왕태비가 되었으며, 내지(內旨)를 내려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선왕이 후사에 대한 유명이 없을 경우에는 그 권한은 대비가 하게 되어 있었다. 정희왕후는 이 권한을 통해 일찍 죽은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성종)을 왕으로 지목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 성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성종의 태평치세의 발판을 닦아주었고, 7년 후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그 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하다가 성종 14년(1483)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선조 대의 이조판서 이기가 쓴 글들을 모은 문집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정희왕후 윤 씨가 수양대군의 부인이 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세종대에 수양대군의 부인을 간택하기 위하여 궁궐의 감찰 상궁과 보모상궁이 윤번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사실 이때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고 한다. 그런데 궁중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 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자태가 더 비범하다고 대궐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언니 대신 수양대군의 부인으로 간택되고,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졌다. 그 후 계유정난 당시에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광릉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 씨의 능으로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모시고, 능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운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조선왕릉 중에서는 이러한 형태로 최초 조성되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세조, 오른쪽 언덕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생략하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석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침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향로와 어로는 유실되어 있는 상태이다. 본래 정자각은 세조의 능역 앞에 있었으나, 정희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두 능의 사이로 옮겨 지은 것이다.


광릉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 씨의 능으로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모시고, 능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운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3. 석보상절(釋譜詳節)』      


 석보상절(釋譜詳節)은 조선 세종 28년(1446) 수양대군이 김수온 등과 함께 편찬, 번역한 불경 언해서이다. 총 24권 24 책이나 현재는 7권 7 책만이 남았다. 국립중앙도서관, 동국대학교 도서관,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었고, 보물 제52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책의 이름에서 석보(釋譜)는 석가모니의 전기(傳記)를 뜻하고, 상절(詳節)은 내용 중 중요한 것은 상세하게 서술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간략하게 줄인다는 의미이다. 『석보상절』은 불교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편찬했기에, 조선 전기 문학, 한글, 인쇄 등의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1446년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수양대군은 크게 충격을 받고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중국 양나라의 승우(僧祐)가 지은 석가보(釋迦譜)와 당나라의 도선(道宣)이 지은 석가씨보(釋迦氏譜) 등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들을 참조하여 모은 후 분류, 편철하여 처음 석보를 제작하여 어머니의 제단에 올렸다. 이를 본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석보를 완성하라는 명을 내리자, 신미, 김수온 등과 함께 기존 석보에 증수석가보, 아미타경, 무량수경, 지장경, 법화경 등의 내용을 추가하고 원문을 한글로 언해한 것이 지금 전해지는 석보상절이다.     


 『석보상절』에서는 석가의 전생으로부터 탄생‚ 수행‚ 득도‚ 교화 등 전 생애를 서술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을 여덟 개로 구분하여 팔상(八相)이라고 하는데, 『석보상절』은 이 순서를 따르고 있다.      


도솔내의(兜率來儀, 도솔에 온 일)

비람강생(毘藍降生, 남비니원에 탄생한 일)

사문유관(四門遊觀, 출가 전 태자 때 인생의 네 가지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 일)

유성출가(逾城出家, 성을 넘어 집을 나간 일)

설산수도(雪山修道, 눈 덮인 산에서 도를 닦은 일)

수하항마(樹下降魔, 나무 밑에서 악마를 항복시킨 일)

녹원전법(鹿苑轉法, 녹야원에서 설법을 한 일)

쌍림열반(雙林涅槃, 쌍림에서 열반에 든 일)     


 그리고 세종이 석보상절을 읽어본 후 찬가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후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쳐 『월인석보』를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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