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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Mar 06. 2024

24.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王陵) - 남양주 사릉

영월 장릉으로 옮겨 심은 사릉의 소나무

1. 정순왕후의 능, 사릉(思陵)- 경기도 남양주     


 사릉은 조선의 6대 왕인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 씨의 능으로 사적 제20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인 문화재이다.      


 정순왕후 송 씨는 본관이 여산인 여량부원군 송현수와 여흥부부인 민 씨의 딸로 세종 22년(1440) 전북 정읍 태인에서 태어났다. 단종 2년(1454)에 타고난 성품과 검소함의 미덕을 인정받아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다음 해인 1455년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이 되자 의덕왕대비로 책봉되었다.

     

 세조 3년(1457)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면서 사육신을 비롯한 단종의 측근 세력들이 제거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고, 정순왕후는 군부인(郡夫人)으로 강등되어 현재의 동대문 밖 정업원(淨業院)에서 생활하였다. 뒤쪽 산봉우리(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비통한 마음으로 단종을 그리워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 후 중종 16년(1521) 82세로 세상을 떠났고, 숙종 24년(1698)에 정순왕후로 복위되었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 2번째로 단명한 국왕인 남편 단종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역대 왕비 중 2번째로 장수한 왕비이다. 즉,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가 요절하고 뒤이어 세조, 예종, 성종의 치세를 거쳐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 세조의 또 다른 증손자인 중종이 즉위해 첫 번째 아내 단경왕후 신 씨를 내쫓고, 2번째 아내 장경왕후와 사별한 뒤, 3번째 아내 문정왕후와 혼인하는 것까지 모두 본 것이다. 사망 당시 세자였던 인종은 그녀의 먼 증손자뻘이 된다.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 했던 불운한 인물로 왕후의 비극에 얽힌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도 단종 복위 사건으로 인해 영월로 유배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 그 뒤부터 이 봉우리는 왕후가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하여 동망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영도교 부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금남의 채소시장이 있었는데 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때마다 왕후에게 채소를 가져다주었는데 이를 궁에서 제지하자 왕후가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장을 열어 주변을 혼잡하게 하고, 계속해서 몰래 왕후에게 채소를 전해주려는 여인들의 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정순왕후는 군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대군 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묘소는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 씨의 선산(양주 군장리)에 조성하여 복위 전까지 해주 정 씨 집안에서 제사를 지냈다.


숙종 24년(1698년)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신주를 종묘에 모셨고,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사릉(思陵)은 정순왕후가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발랐다’는 구절에서 나온 이름이고, 한편으로는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기도 하다. 계유정난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단종과 영도교에서 18살에 헤어진 후 82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평생 남편을 그리워하며 지낸 정순왕후의 아픈 사연과 삶이 서려 있는 곳이다.     


 사릉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데, 원래 왕릉 주변에는 민가나 민간인의 묘를 쓸 수 없게 되어 있지만 사릉에는 해주 정 씨 일가의 묘들이 사릉 주변으로 분포되어 있다. 정순왕후가 군부인으로 세상을 떠나자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시댁 해주 정 씨 집안에서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고 제사도 지내주었다. 이후 숙종 대에 정순왕후가 복위되자 무덤도 능으로 다시 조성하게 되었는데, 이때 주변에 있던 해주 정 씨의 묘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숙종의 명으로 그대로 두기로 하여 현재까지도 남아있게 되었다.      

 또한 사릉이 있는 남양주시와 단종이 장릉이 있는 영월군과는 자매결연을 맺었으며, 능을 합장하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기에 그나마 사릉의 소나무를 장릉으로 옮겨 심어 왕과 왕비의 애틋한 사연을 그나마 달래주고 있다.

 영월 장릉으로 옮겨 심은 사릉의 소나무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석양과 석호를 하나씩 줄였으며, 무석인을 생략하였다. 문석인과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설치하였다. 정자각은 다른 왕릉에 비해 아담한 모습이고,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향로와 어로는 중간에 끊어져 있다. 사릉은 문화재청 관할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어서 많은 전통 수종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사릉은 문화재청 관할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어서 많은 전통 수종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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