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王陵)이란, 왕과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능(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즉 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그리고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은 원(園)이라고 한다. 그 외왕족들이나 폐위된 왕의 무덤은 묘(墓)로 분류한다.
가정 먼저 선사시대의 왕릉은 당연 고인돌이다. 역사상 청동기시대부터 계급이 생겨났으므로 부족장이나 군장이 그 집단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고인돌의 크기가 클수록 그 주인의 권위와 업적을 나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노동력과 재정이소모되었기에, 차츰 철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고인돌은 거의 없어지고 토광묘나 옹관묘 같은 비교적 쉬운 묘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만 왕의 무덤은 일반인과는 당연히 달라야 했기 때문에 크기를 크게 하거나, 매장 시부장품(副葬品)을 같이 묻어 만들었다. 하지만 왕의 무덤이라는 표시가 나기 때문에 도굴이 될 수밖에 없었고, 3세기 이전의 왕릉 중에서 온전한 것은 거의 없다. 도굴당하지 않고 그대로인 왕릉도 있겠지만 발견이 되지 않았거나 방어 장치가 너무 강해 접근할 수 없는 경우다.
왕릉, 신들의 정원으로 떠나보자.
2.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이란, 조선(1392~1897)과 대한제국(1897~1910)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가 묻힌 능(陵)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총 42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태조의 추존 4대 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능까지 포함하면 총 50기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론 42기의 능만을 조선왕릉으로 취급하고 있다.
조선왕릉은 2009년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를 통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현재 북한에 위치하고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40기 만이 등재되었다. 그리고 폐위되어 임금의 능이 아닌 왕자의 묘가 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역시 제외되었다.
조선왕릉의 경우, 다른 왕조의 능과는 달리 아직까지 무덤 내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는 왕릉 제례를 맡은 전주 이 씨 종약원에서 발굴에 동의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건전한 학술 연구라고 해도 무덤을 완전히 파헤쳐야 하니 예법상 매우 꺼릴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조선왕릉 이외에도 천마총과 황남대총 같은 삼국시대 왕릉급 고분들을 발굴했던 것도 예전 일제강점기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현재 발굴은 경주 김 씨 등 문중의 반대가 강해 어렵다. 이 때문에 조선왕릉의 내부구조는 조선왕조실록 등 왕릉 축조에 대한 기록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릉의 기본적인 조성 규정을 담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포함해 국장 과정과 택지 정보 및 능침 조영 등의 자료를 담은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등 관련 자료들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편이라서, 굳이 발굴하지 않아도 내부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왕릉은 조선 시대 당시에도 조정이 엄격히 관리하였거니와, 일제강점기 기간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당연히 중요하게 다뤄서 관리하였다.
또한 시신을 안치한 석실에 석회를 두껍게 바른 회곽묘라서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나 폭약 없이 소수 인력이 도굴이 불가능한 데다, 검약(儉約)을 강조한 유교 윤리에 따라 온갖 진귀한 부장품을 가져다 묻은 이전 왕조와는 다르다.
왕릉 주변이 훼손되었을지언정 왕릉 자체는 보존되었다. 구한말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벌어졌으나 석회벽에 막혔고, 2007년 서오릉 순창원도 당시 자행됐던 도굴 시도 역시 두터운 석회벽에 막혀 미수에 그쳤다.
조선의 왕릉들은 주변의 지명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덕왕후 강 씨의 정릉(성북구 정릉동), 문정왕후 윤 씨의 태릉(태릉 선수촌), 세조의 광릉(광릉 수목원) 등이 그러하고, 그 외에도 조선왕릉에서 역명을 따온 철도역인 선릉역, 선정릉역, 태릉입구역, 정릉역, 온릉역, 사릉역, 세종대왕릉역 등이나 태종의 능침 앞을 지나는 도로인 헌릉로 및 선정릉 앞을 지나가는 도로인 선릉로와 정릉 앞을 지나가는 정릉로, 용인서울고속도로의 헌릉 IC 등의 지명이 그 예이다.
조선왕릉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수도인 한양 인근인 경기도에 주로 밀집해 있는데 이는 조선의 국법인 경국대전에서 '왕릉은 도성에서 10리(약 4km) 이상, 100리(40km) 이하의 구역에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도성 내, 즉 옛 한양 시가지 내에 있는 조선왕릉도 없다. 조선 초기 신덕왕후 강 씨의 능인 정릉이 태조의 명에 따라 도성 내에 있었으나, 이후 태종 때 현 위치로 이장했다.
한편 이러한 규정에 어긋나는 예외적인 부분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동북면 (지금의 함경도)에 있는 태조의 조상들을 추존한 왕릉(목조~환조) 8기.
2. 개성에 있는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이자 추존된 한 씨(신의왕후)의 제릉, 같은 개성에 있는 조선의 2대 임금인 정종(조선)과 정안왕후의 후릉.
3. 귀양지에서 죽은 뒤 이후 추숭하면서 무덤을 그대로 격상한 단종의 장릉.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4. 원래 장지에 문제가 생겨서 불가피하게 이장해야 했던 영녕릉(세종, 효종). 세종의 왕릉은 본래 부왕인 태종의 왕릉인 헌릉 인근에 있었다. 그런데 이미 세종 재위 기간에 최양선이라는 풍수가가 '이곳은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입니다'라고 살벌한 주장을 했다. 이 예언이 맞았는지 계유정난 등 왕실에 피바람이 불면서 터가 불길하다는 인식이 박혔다. 이 때문에 예종 때 현 위치로 이장했다. 효종의 무덤은 본래 동구릉 구역에 있었으나 자꾸 석물이 파손되는 사고가 일어나자 현종 때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5. 국왕 본인의 특별한 지침을 따른 정조의 융건릉.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현대의 동대문구)에서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하고 이후 정조 본인의 유언대로 아버지의 무덤 근처에 왕릉을 만들었다.
3. 조선 왕릉의 형식
조선왕릉은 기본적으로 유교 예법에 근거하여 공간이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봉분의 조성 형태에 따라 형태적 차별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크게 단릉, 쌍릉, 합장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삼연릉의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단릉 형식은 태조(건원릉)부터 시작하여 조선 중기까지 나타나며 18세기 이후에는 거의 볼 수 없다. 쌍릉 형식은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고르게 나타나며, 동원이강릉 형식은 세조(광릉)를 시작으로 15세기에만 집중되었을 뿐 이후에는 볼 수 없다.
합장릉의 형식은 18세기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능역 조성 시 소요되는 경비와 인력을 절감하기 위해서이다. 그 밖에 풍수적인 입지와 공간적으로 협소하여 동원상하릉의 형식과 삼연릉 형식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단릉(單陵)
단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한 능이다. 대표적으로 태조 건원릉, 단종 장릉, 중종 정릉 등 15기의 능이 있다.
쌍릉(雙陵)
쌍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곡장 안에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의 원칙에 따라 조성하였다. 대표적으로 명종 강릉, 영조 원릉, 철종 예릉 등 9기의 능이 있다.
합장릉(合葬陵)
합장릉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능이다. 영조 이전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2좌씩 배치하였으나 영조 이후에는 혼유석을 1좌씩 배치하였다. 대표적으로 세종 영릉, 인조 장릉, 정조 건릉 등 8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순종황제 유릉은 황제와 황후 두 분을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동봉삼실(同封三室) 합장릉이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동원이강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능이다. 최초의 동원이강릉은 세조 광릉이며, 예종 창릉, 성종 선릉 등 7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선조 목릉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언덕(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하였고, 숙종 명릉은 쌍릉(숙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의 형태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동원상하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능으로,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조성하였다. 효종 영릉과 경종 의릉 2기가 해당되며, 왕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다.
삼연릉(三連陵)
삼연릉은 한 언덕에 왕과 두 명의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헌종 경릉이 유일하다.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오른쪽(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왕을 모시고 첫 번째 왕비(효현성황후)와 두 번째 왕비(효정성황후)를 순서대로 모셨다.
4. 조선왕의 건강
519년의 긴 세월을 이어온 조선과 대한제국에는 모두 27명의 왕과 황제가 존재하였다. 왕들은 장엄한 궁궐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의들이 궁궐에서 늘 왕의 건강을 살폈다. 그러나 왕들은 호화로운 환경에서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였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4세로 주로 눈병, 종기, 중풍 등의 병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단 왕위에 오르면 그 뒤로는 정신없이 바쁜 왕의 일과가 시작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처럼 쌓여 있기 때문에 왕이 집무하는 일들을 만 가지 일이라는 뜻의 “만기(萬機)”라고 하였다. 왕은 주로 앉아서 신료들을 만나고 공문서를 읽었으며, 이동할 때는 가마를 이용하였다. 격구나 활쏘기 등의 간단한 활동을 제외하고는 운동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혈액 순환이 원활히 되기가 어려웠고, 당뇨와 고혈압에 쉽게 걸렸다. 눈병이나 종기가 나면 쉽게 낫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왕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세종과 숙종이 당뇨병으로, 태조, 정종, 태종이 중풍으로 인한 뇌출혈로, 문종, 성종, 효종, 정조, 순조가 종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가 하면 질병과는 상관없이 정치적 희생양으로 유명을 달리한 왕도 있다. 6대 임금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당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감옥이나 다름없는 영월의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결국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단종과는 다른 경우이나 연산군과 광해군도 반정에 의해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5. 조선왕의 장례 절차
왕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왕릉 이야기이니만큼 이 장에서는 왕의 건강과 죽음과 관련된 일련의 절차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보통 사극이나 영화에서 보면 왕이 승하하면 내시 중 한 명이 지붕에 올라가 무언가를 외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이때 내시는 평상시 왕이 입던 옷을 입고 올라가 북쪽을 향해 선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옷의 깃을,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를 잡고 “상위 복(上位復)” 하고 세 번을 외친다.
여기서 “상위 복”의 뜻은 “임금의 혼이여, 돌아오소서”이다. 즉 왕의 혼이 자신의 체취가 벤 옷을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왕의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간은 5일이었고, 이 기간 동안은 왕이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세자가 다음 왕으로 즉위하지도 않았다. 5일이 지나도 왕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입관을 하고 세자의 즉위식이 치러졌다.
왕비가 죽었을 때에도 같았는데, 이때는 “중궁 복(中宮復)”이라고 외쳤다.
왕이 승하하게 되면 임시 관청인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었다. 이 중 국장도감은 장례를 주관했고, 빈전도감은 빈전의 설치와 운영을, 산릉도감은 왕릉의 조성을 담당했다.
특히 빈전의 설치는 우리 고대사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바로 백제 무령왕릉이다. 빈전에 안치된 왕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얼음이 필요했는데, 이를 저장했던 시설이 바로 석빙고다. 지금도 서울의 지명 가운데 동빙고동(東氷庫洞), 서빙고동(西氷庫洞) 등이 있어 석빙고와 관련 있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빈전의 설치 기간은 약 5개월로 이후 왕의 시신을 재궁(梓宮)에 모셔 대여(大轝)에 실은 뒤 장지(葬地)로 이동했다.
장지에 도착한 뒤 재궁을 묻고, 뽕나무로 왕의 혼백을 담은 신주(位牌)를 썼다. 이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기 전까지 혼전(魂殿)에 봉안했다. 이후 3년이 지나면 종묘에 모시는데 이를 부묘(祔廟)라고 한다.
6. 조선왕릉의 공간 구성
조선왕릉은 진입 공간, 제향 공간, 능침공간의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공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왕릉은 죽은 자를 위한 제례의 공간이므로, 동선 처리에 있어서도 이에 상응하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동선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죽은 자의 동선만을 능침영역까지 연결시켜 공간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향로·어로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동선은 공존하되 구별되어 있다. 즉, 산 자는 정자각의 정전에서 제례를 모신 뒤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는 정자각의 정전을 통과하여 능침공간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답사자의 시각에서 왕릉 입구에서부터의 건물 및 구조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진입 공간은 왕릉의 시작 공간으로, 관리자(참봉)가 머물면서 왕릉을 관리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齋室)에서부터 시작한다. 능역으로 들어가기 전 홍살문 앞에는 금천교(禁川橋)라는 다리가 있는데 왕과 왕비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한다.
재실(齋室) : 왕릉 관리자가 상주하며 제례에 필요한 제수를 준비하는 곳.
금천교(禁川橋) :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돌다리
두 번째, 제향 공간은 산 자(왕)와 죽은 자(능에 계신 왕이나 왕비)의 만남의 공간으로, 이곳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제향 공간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紅箭門]부터 시작된다. 홍살문 옆에는 돌을 깔아 놓은 배위(拜位)가 있는데 참배하러 온 왕을 위한 자리이다. 홍살문 앞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주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는 박석을 깔아 만든 돌길인데, 홍살문 기준으로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라 하고, 오른쪽의 낮은 길은 왕이 사용하는 길이라 하여 어로라 한다. 일부 왕릉에서는 향·어로 양 옆으로 제관이 걷는 길인 변로(邊路)를 깔아 놓기도 하였다. 향·어로 중간 부근 양옆으로는 왕릉 관리자가 임시로 머무는 수복방(守僕房)과 제향에 필요한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수라간(水刺間)이 있다. 정자각에서 제례를 지낸 후 축문은 예감(瘞坎)에서 태우는데, 정자각 뒤 서쪽에 위치해 있다. 조선 전기에는 소전대(燒錢臺)가 그 기능을 하였으나 후에 예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자각 뒤 동북쪽에는 장방형의 산신석(山神石)이 있는데, 산을 주관하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자리이다.
홍살문(紅箭門) : 궁(宮), 관아(官衙), 능(陵), 묘(廟) 등의 입구에 세우는 붉은 문으로 귀신을 쫓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는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의미이다.
배위(拜位) : 홍살문 오른편에는 현재 왕이 도착해 선왕에게 절을 할 수 있는 자리이다.
향어로(香御路) :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잇는 길로, 신이 가는 길인 향로와 왕이 가는 길인 어로가 있다.
수라간(水刺間) : 제례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로 정자각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왼편에 있다.
수복방(守僕房) : 왕릉 관리자가 머무는 건물로 정자각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편에 있다.
정자각(丁字閣) :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건물로, 지붕이 정(丁) 자와 같아 정자각이라고 부른다.
비각(碑閣) :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
예감(瘞坎) : 제례 때 사용한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봉분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왼편에 있다.
산신석(山神石) : 왕릉이 있는 산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는 곳으로 봉분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편에 있다.
마지막, 능침공간은 봉분이 있는 왕릉의 핵심 공간으로 왕이나 왕비가 잠들어 계신 공간이다. 능침공간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으며, 능침의 봉분은 원형의 형태로 태조의 건원릉을 제외한 모든 능에는 잔디가 덮여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봉분의 직경은 약 18m, 높이는 약 4m’로 조성하게 되어 있으나 후대로 갈수록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 평균 직경 약 11m를 이루고 있다.
석마(石馬) : 문석인과 무석인의 뒤나 옆에 배치하는 말 모양의 석물
무석인(武石人) : 왕을 호위하는 무인을 상징하는 석물
문석인(文石人) : 왕을 보좌하는 문인을 상징하는 석물
장명등(長命燈) : 어두운 사후세계를 밝힌다는 의미를 지닌 석등
혼유석(魂遊石) : 왕과 왕비의 혼이 노니는 곳
망주석(望柱石) : 봉분의 좌우에 세우는 돌기둥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 왕릉을 수호하는 호랑이와 양 모양의 석물로 네 마리씩 교대로 밖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난간석(欄干石) :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돌
병풍석(屛風石) :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의 아랫부분에 둘러놓은 돌
봉분(封墳) : 왕릉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
곡장(曲墻) : 봉분의 동, 서, 북쪽에 둘러놓은 담장
7. 조선왕릉 알아보기 『서삼릉(西三陵)』 - 경기도 고양
서삼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조선 왕조의 왕릉으로 희릉, 효릉, 예릉이 조성되면서 세 개의 능이 한양의 서쪽에 있으므로 ‘서삼릉’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사적 제200호 “고양 서삼릉”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왕릉들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서삼릉에는 중종의 계비이자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가 안장되어 있는 희릉(禧陵),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孝陵),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의 예릉(睿陵)이 조성되면서 세 개의 왕릉이 자리 잡고 있다.
왕이나 왕비의 무덤은 왕릉으로 조성되지만, 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그리고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은 원(園)으로 조성된다. 여기 서삼릉에는 의소세손의 의령원(懿寧園)과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이 옮겨와 있으며, 서삼릉 내 비공개 지역에는 소현세자의 소경원(昭慶園)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연산군의 사친 폐비 윤 씨의 회묘(懷墓) 있으며, 조선 왕조의 많은 태실이 옮겨와 있다.
8. 중종의 비 장경왕후의 능, 『희릉(禧陵)』
서삼릉 답사도 매표소에서 시작하여 관람 동선에 맞게 하나씩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장경왕후 윤 씨는 중종 1년(1506)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내명부 종 2품)로 책봉되었다가, 중종의 첫 번째 왕비가 폐위되면서 이듬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의 계비이면서 인종의 친어머니이며, 성종과 정현왕후의 며느리이다. 중종 사이에서 효혜공주와 인종을 낳았으며, 중종 10년(1515)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경복궁 동궁 별전에서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튿날 새벽 병세가 매우 중해지자 일어나 앉아 손수 글을 써서 상께 아뢰기를 '어제 첩의 마음이 혼미하여 잊고 깨닫지 못하였는데 생각해 보니 지난해 여름 꿈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억명(億命)'이라 하라 하므로 써서 벽상에 붙였었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0년(1515) 3월 7일 4번째 기사
장경왕후는 죽기 전에 당시 원자였던 인종의 이름을 억명으로 지어달라고 말했다. 일설에는 이렇게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인종은 피휘(避諱)하기 위해서 '호(峼)'로 이름을 고친다.
중종 때 조정이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나누어져 있을 때, 대윤의 우두머리가 되는 윤임이 장경왕후의 친오빠이다. 이 때문에 을사사화 당시 윤임을 비롯한 장경왕후의 친정 가족들은 문정왕후와 소윤 세력에게 대거 숙청을 당하게 된다. 그나마 장경왕후의 친아버지 윤여필은 나이가 많아서 잠시 용인에 유배를 갔다가 문정왕후가 '윤여필은 장경왕후의 지친(아버지)이므로 특별히 방면한다'라며 풀어주었다.
파란만장한 짧은 인생은 살았지만 죽고 난 뒤에도 편치는 못했다.
첫 번째는 본인이 죽고도 20년이 지난 중종 32년(1537)에 벌어졌는데 김안로 세력은 장경왕후를 매장할 때 능에서 돌이 나왔다며 국모를 매장하는데 좋지 못한 자리를 썼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자(인종)를 보호할 목적으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희릉 천릉 사건’이다. 희릉에 돌이 많고 물이 고인다는 이유를 들며 천릉(遷陵)을 주장하면서 희릉을 조성하는데 관여했던 정적을 처벌하였다.
희릉에 악석이 많았다는 김안로 등의 주장은 정작 능을 파보니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결국 희릉 천장에는 묏자리가 불길하다는 풍수상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뒤에는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척신 김안로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왕릉 천장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대표적인 사례다.
두 번째는 명종 시기인데 중종이 죽은 후 중종은 장경왕후 곁에 묻혔는데, 문정왕후는 자신이 중종과 함께 하기 위해 풍수지리를 핑계 삼아 중종의 능을 현재 선릉 옆에 있는 정릉으로 천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중종의 정비였던 단경왕후는 현재의 경기도 양주 온릉에 묻히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종(서울 강남구 정릉)과 중종의 비였던 단경왕후(경기도 양주시 온릉), 장경왕후(경기도 고양시 희릉), 문정왕후(서울 노원구 태릉) 4명 모두 각기 다른 장소에 안장되어 있다.
희릉의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며 갑옷의 조각 수법을 보면 작고 섬세한 문양들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문석인 역시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 역시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노출해서 맞잡고 있다. 소매의 안쪽으로 작은 소매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이중 소매를 보여주고 있다.
아들 인종을 낳고 7일 만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난 장경왕후, 여기 묻힌 장경왕후는 30년 뒤 인근으로 묻히게 된 아들 인종에게 어떠한 말로 위로를 전했을까?
9.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 『효릉(孝陵)』
조선 12대 왕 인종은 중종과 장경왕후 윤 씨의 아들로 중종 10년(1515)에 경복궁 동궁 별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장경왕후 윤 씨가 인종을 낳고 7일 만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어린 인종은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으나, 문정왕후의 성격과 기질이 고약하여 인종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목숨마저 위태로운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세력화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인종의 엄마도 윤 씨, 문정왕후도 윤 씨였다. 그래서 인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무리를 대윤, 문정왕후 소생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이들을 소윤이라 불렀다. 중종 15년(1520)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조선 역대 국왕 중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9개월의 기간을 재위한 인종은 기묘사화로 유명무실해진 현량과를 복구하고, 조광조를 복권시켜 주었으나, 중종의 상을 치르면서 병세가 악화되어 인종 1년(1545)에 경복궁 청연루 소침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고양 서삼릉(高陽 西三陵) 경내에 위치하며, 생전 그의 지극했던 효심을 기리는 뜻으로 능호를 효릉(孝陵)이라고 지었다.
인성왕후 박 씨는 중종 19년(1524)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종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명종 즉위 후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되었다. 선조 10년(1577)에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인종, 오른쪽이 인성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인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형식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효릉 조성 당시에는 병풍석이 없었으나 선조 11년(1578)에 인성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병풍석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인성왕후의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효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한 미공개 왕릉이었으나, 2023년 9월 8일부터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다. 효릉이 그동안 미공개로 남아있었던 이유는, 효릉을 가려면 젖소개량사업소를 거쳐야 하는데 업무 특성상 외부인 출입이나 접근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효릉은 문화유산 수리 및 관리, 학술조사 등 필요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출입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젖소개량사업소를 거치지 않고, 서삼릉 내 태실에서 효릉으로 이어지는 관람로를 내서 통행 문제를 해결하였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고 문정왕후의 핍박 속에 31세 짧고 모진 생을 살다 간 아들 인종에게 희릉의 장경왕후는 어떤 말로 위로와 미안함을 전하고 있을까?
10.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 『예릉(睿陵)』
조선의 25대 왕 철종은 본관이 전주(全州)로, 이름은 이변(李昪)이고, 초명은 이원범(李元範)이다. 정조의 동생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다. 헌종 10년(1844) 형 회평군(懷平君)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평범한 나무꾼이자 농부로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칭하는 별명은 ‘강화도령’이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인 철종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철종의 나이 19세였고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 즉위한 방계 출신 군주이며 당대 실권자인 안동 김 씨 세도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세워진 군주였다.
1852년부터 친정을 했으나 정치적 실권은 안동 김 씨 일족이 좌우하였고, 삼정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1862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동학이 크게 번창하자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창시자 최제우를 처형했다.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 등 민생을 돌보려는 시도도 하였으나 미약한 왕권과 세도 가문의 간섭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하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요절했다. 대한제국 선포 후 융희 2년(1908)에 철종장황제로 추존되었다. 또한 철종은 실질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이 편찬된 마지막 국왕이기도 하다.
철인왕후 김 씨는 안동 김 씨 세도가인 영은부원군 김문근과 흥양부부인 민 씨의 딸로 1837년 태어났다. 철종 2년(1851) 왕비로 책봉되었고, 철종 9년(1858)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다. 철인왕후는 세도 가문인 안동 김 씨 출신의 왕비였지만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고, 말수가 적고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한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순대비(明純大妃)가 되었으며, 고종 15년(1878년) 창경궁 양화당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융희 2년(1908)에 철인장황후로 추존되었다.
예릉은 철종과 철인왕후 김 씨의 능이다.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철종, 오른쪽이 철인왕후의 능이다. 예릉은 『국조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하여 조성된 마지막 조선왕릉이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예릉의 문무석인과 석마, 장명등, 석양과 석호 일부는 중종의 구 정릉(靖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정릉(靖陵)을 서울 강남으로 천장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장명등은 문석인 가운데가 아닌 능침 앞쪽으로 배치한 것이 특징인데, 이는 조선시대 왕릉 중 예릉만의 유일한 배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