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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Nov 15. 2023

22.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王陵) - 화성 융건릉편

당일형 답사

1. 조선왕릉 알아보기 융건릉(隆健陵)- 경기도 화성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군(群)으로,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가 함께 묻힌 융릉(隆陵), 그의 아들인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효의왕후가 함께 묻힌 건릉(健陵)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수원 고을의 진산이었던 화산(華山) 아래에 조성된 능이라 하여 '화산릉(華山陵)'이라고도 불린다. 선정릉(봉은사)과 같이 융건릉의 능침사찰이 있는데, 바로 화성시 송산동의 ‘용주사’이다. 융건릉과 용주사는 거리로 약 2km 정도 거리이니 날씨가 좋은 날이면 한 코스로 돌아보는 것이 좋다.      

 융건릉은 1789년부터 1900년까지 조성이 이루어졌다. 특히 사도세자의 융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조선왕릉의 3대 분류인 묘(墓), 원(園), 능(陵)을 모두 겪은 왕릉이다. 무덤의 주인만큼 무덤 역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사도세자가 승하하고 정조를 비롯한 그의 후손들이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 과정을 보면 다름과 같다.     


1. 영조 38년(1762) 현재 동대문구 일대인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장사 지내고 수은묘(垂恩墓)라고 부르게 된다.   

2. 정조 즉위년(1776)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의 격을 묘(墓)에서 원(園)으로 올려 영우원(永祐園)으로 고쳐 부르게 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시호도 사도에서 장헌으로 새로 개칭한다. 이후 영우원의 위치를 현재 화성의 위치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부르게 하였다.     

3. 광무 3년(1899)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어서 장종(莊宗)이란 묘호를 올리고 현륭원도 왕의 예에 따라 융릉(隆陵)으로 격상되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애틋했던 두 부자의 이야기 속으로 답사를 가보자.


2.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 씨) , 융릉(隆陵)     

 장조(사도세자)는 영조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영조의 후궁 영빈 이 씨이다. 정실 아내는 혜경궁 홍 씨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정조를 낳았다. 아버지와 오랜 갈등 끝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7월의 한여름 삼복더위에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은 것, 즉 『임오화변』으로 유명하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웠으며,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영조 25년(1749)에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그를 경계하는 노론 벽파 세력들이 왕세자를 모함하여 영조와 왕세자 간의 갈등이 비롯되었다.     

 

 특히 영조 38년(1762) 형조판서 윤급의 하인인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를 올리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왕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왕세자가 명을 따르지 않자 영조는 왕세자를 폐서인(廢庶人) 한 후 뒤주에 가두었고 8일 만에 굶어 죽었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세자를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대한제국 광무 3년(1899)에는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장종이라 하였다가, 곧바로 황제로 추존되어 장조의황제가 되었다.     


 사도세자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영조는 조선 후기를 중흥으로 이끈 군주로 평가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비정한 아버지로 기억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 사건은 단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왕조시대 국가의 지도자와 차기 지도자 간의 정치적 갈등, 정치 세력 간의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헌경왕후 홍 씨는 영조 20년(1744)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영조 38년(1762)에 장조가 세상을 떠나자 혜빈에 봉해졌다.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호칭을 높여 혜경궁(惠慶宮)이라 하였다. 혜경궁 홍 씨의 아버지와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었지만 폐세자를 주장하는 노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숙부 홍인한은 심지어 영조가 세상을 떠나기 전,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의 대리청정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었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혜경궁 홍 씨는 왕세자의 참변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여인이었다.    

  

이후 정조 19년(1795) 그녀의 한 많고 억울한 궁중 생활을 자전적 회고록인 『한중록』으로 남겼다. 사료적 가치가 풍부한 『한중록』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함께 3대 궁중문학으로 일컬어진다.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을 하다가 순조 15년(1815)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의 능으로 합장릉이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는데 1기는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표석(조선국 사도장헌세자현륭원)이고, 1기는 대한제국시대에 세운 황제국 표석(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이다.     


 능침은 난간석을 생략하고 병풍석만 둘렀으며, 병풍석의 면석은 인조의 장릉(長陵)의 형태를 따랐고, 인석은 연꽃 형태로 조각한 것이 독특하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특히 문석인은 복두를 쓴 일반적인 왕릉형식이 아닌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융릉은 다른 조선왕릉과는 달리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이 아니라 능침이 오른편으로 비켜 있다. 그 이유는 정자각을 지을 때 능침 바로 아래가 아니라 옆으로 비켜서 지으라고 정조가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정조는 "뒤주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앞을 막아서야 죽은 뒤에도 얼마나 답답하시겠느냐"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신하들은 그 자리에서 목놓아 통곡했다고 한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융릉은 다른 조선왕릉과는 달리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이 아니라 능침이 오른편으로 비켜 있다.

3.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閑中錄) 

    

 한중록(閑中錄)은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혜경궁 홍 씨의 회갑이 되던 해에 쓰였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에서 1805년 사이에 쓰였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 생활을 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어 의도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 삼촌, 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사건의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절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 사건의 배후에는 홍국영의 개인적인 원한 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 다음 해 써진 것으로 주제가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 나인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 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으나 둘의 성격 차로 인해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영조 38년(1762)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4. 정조와 효의왕후 능, 건릉(健陵)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의 둘째 아들로 영조 28년(1752)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영조 35년(1759)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영조 38년(1762)에 아버지 장조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을 겪었다.      

 1762년에 영조는 정조에게 왕위 계승의 명분을 주기 위해 일찍 세상을 뜬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게 하였다. 영조 51년(1775)부터는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이듬해인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고는 먼저 아버지 장조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노력하였으며,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를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규장각 설치, 신해통공(금난전권 폐지 등) 실시,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임진자(壬辰字)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고, 『증보동국문헌비고』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이론이 중시되는 성리학에 치우치지 않고, 실학을 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기를 가져왔다. 가난한 백성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을 공포하고, 제도 개편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1800년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순조는 묘호를 정종(正宗)이라 올렸으며, 대한제국 선포 후 광무 3년(1899년)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정조선황제로 추존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의 원이었던 영우원(永祐園)을 지금의 자리인 현륭원(顯隆園)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수원 화성을 축조하였으며,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 행궁, 안양 행궁, 사근 행궁, 시흥 행궁, 안산 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정조 13년(1789)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다음 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닌 계몽 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 강화 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효의왕후 김 씨는 영조 38년(1762)에 왕세손빈으로 책봉되었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정순왕후 김 씨와 헌경왕 홍 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일생을 검소하게 지내어 수차례에 걸쳐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선왕께서 존호를 받지 못하신 것이 마음속에 한으로 남아 있는데, 미망인으로서 이를 받는 것이 어찌 가당하단 말인가.”하며 모두 거절하였고, 순조 20년(1820)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역시 같은 이유로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 후 순조 21년(1821) 창경궁 자경전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을 수 없어 불안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타고난 덕망으로 뭇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순조실록』에 실린 효의왕후의 행장에는 성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아랫사람을 반드시 성의와 신의로써 대하여 일찍이 천히 여기고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을 열고 얼굴을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적인 은정으로 봐주지 않았으므로, 좌우에 있는 궁중의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할 줄 알았다. 친척 중에 과실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꾸짖지는 않았으나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아 그로 하여금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마음에 부끄럽고 송구하여 벌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하다.”라고 하였다. 또, 자신의 봉양에 매우 검소하여 복식과 기물이 하나도 좋은 것이 없었고 겨우 사용할 수 있는 것만 취할 뿐이었다. 평소의 반찬이 더러 마음에 맞지 않을 때 좌우에서 담당자를 치죄할 것을 청할 경우 “어찌 구복(口腹) 때문에 사람을 치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왕후 김 씨의 능이다.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이며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정조 24년(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장조의 융릉(당시 현륭원)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 건릉 불길론이 있었고, 순조 21년(1821)에 효의왕후 김 씨가 세상을 떠나자 건릉의 천장이 결정되었다. 이후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능자리가 결정되면서 합장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다.

     

사진은 정조가 사도세자에게 제향을 모시기 위해 왔다고 알리는 알릉례(謁陵禮)와 마치고 돌아간다고 알리는 사릉례(辭陵禮)를 올리던 판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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