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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Oct 26. 2023

21.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王陵) -헌인릉 편-

당일형 답사

 


1. 신들의 정원조선왕릉(王陵)     

 왕릉(王陵)이란, 왕과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능(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즉 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그리고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은 원(園)이라고 한다. 그 외 나머지 왕족들이나 폐위된 왕의 무덤은 묘(墓)로 분류한다.     


 가정 먼저 선사시대의 왕릉은 당연히 고인돌이다. 역사상 청동기시대부터 계급이 생겨났으므로 부족장이나 군장이 그 집단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고인돌의 크기가 클수록 그 주인의 권위와 업적을 나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노동력과 재정이 소모되었으므로, 차츰 철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고인돌은 거의 없어지고 토광묘나 옹관묘 같은 비교적 쉬운 묘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만 왕의 무덤은 일반인과는 당연히 달라야 했기 때문에 크기를 크게 하거나, 매장 시 부장품(副葬品)들을 같이 묻어 만들었다. 하지만 왕의 무덤이라는 표시가 나기 때문에 도굴이 될 수밖에 없었고, 3세기 이전의 왕릉 중에서 온전한 것은 거의 없다. 도굴당하지 않고 그대로인 왕릉도 있겠지만 발견이 되지 않았거나 방어 장치가 너무 강해 접근할 수 없는 경우다.     


왕릉, 신들의 정원으로 떠나보자.      


2. 조선 왕릉의 변화과정     

 조선 왕릉은 고려를 계승하면서도 진입로나 배치방식, 석물 등이 고려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국조오례의』에 기초하여 조선왕조 내내 일관성 있게 왕릉의 형태를 유지하여 왔다. 조선시대의 왕릉제도는 원칙적으로 고려 말의 왕릉제도를 계승하고 있으나, 시대에 따른 자연관과 유교적 세계관, 그리고 풍수지리 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보다 특색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선의 왕릉은 기본적으로 엄격한 예법에 의거하여 조성되었기 때문에 조성의 방식은 원칙적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능역 주변의 자연 지형과 조화되도록 하고, 때로는 능주의 유언이나 능주의 생전 삶의 태도를 감안하기도 하며, 때로는 후손들의 의지나 시대적, 정치적 상황이 개입되어 각 능마다 약간의 변화와 특징이 나타나기도 한다. 능의 전반적인 형태를 고려할 때, 그 변화의 과정은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1기 – 건원릉(健元陵) : 고려시대의 양식을 계승

2기 – 영릉(英陵) : 조선시대의 고유한 묘제가 정비독립된 양식을 반영

3기 – 광릉(光陵) : 풍수지리 사상을 더욱 강조간결화된 능침공간

4기 – 원릉(元陵) : 능침의 위계 변화와 간소화된 상설체제

5기 – 홍릉(洪陵) : 황제의 능으로 조성되어 능침의 상설체제가 변화      

         

3. 조선 왕릉의 건축물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제향을 위한 건물로, 정전(正殿)과, 배위청(拜位廳)이 결합되어 한자 정(丁) 자형을 이루고 있다. 정전은 대부분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면 3칸은 모두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배위청은 정면 1칸에 측면 2칸으로 6개의 나무 기둥만이 세워지고 사방이 개방되어 있어서 제사를 지낼 때 움직임을 편하게 한다.     


월대와 기단은 화강석 장대석을 쌓아 구성했으며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월대의 양 측면에 설치되어 있다. 동쪽 계단은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두 계단 중 하나는 향로계(香路階)로 측면에 구름 문양을 새긴 장식이 있는데, 향로라고 부르는 향을 모시고 가는 길과 이어진다.  임금조차도 이 계단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그 옆 간소하게 꾸며진 어로계(御路階)를 이용한다. 서쪽 계단은 제사가 있을 때 수라간에서 준비한 음식물을 나르는데 이용되거나 제사가 끝난 후 축문을 태우기 위해 예감으로 축문을 들고 갈 때 사용한다.     


 조선왕릉의 정자각은 5칸 건물이 정형으로 알려져 있으나, 시기에 따라 정전의 좌우에 익랑을 설치한 8칸 정자각(정전 5칸, 배위청 3칸)이 선택되어 지어졌다. 현존하는 8칸 제도의 정자각은 숭릉을 비롯하여 익릉, 휘릉, 의릉의 정자각이 있다. 

    

 지붕의 형태도 팔작지붕이 일부 사용되었으나 현재 남은 정자각은 대부분이 맞배지붕이다. 산릉도감의궤 등 문헌에 의하면 영릉(英陵), 강릉(康陵), 장릉(長陵), 영릉(寧陵)의 정자각이 팔작지붕이었으나, 후대에 모두 맞배지붕으로 교체되어 현재는 숭릉의 정자각만이 유일한 팔작지붕으로 남아있다.   

  

비각(碑閣)

 무덤 주인공의 표석(비)을 놓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 비각이다. 표석은 보통 1.5미터 높이의 장방형 돌에 주인공의 호칭을 새기고 간략한 이력을 적는데 하부에 받침돌이 있고 위에도 화강석으로 기와지붕 형태를 다듬어 올려놓는다. 비각은 보통 정면과 측면 각각 1칸의 간소한 규모이다. 벽의 하부는 전돌로 채워서 내구성을 높이지만 상부는 나무로 창살만을 내서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한다. 지붕은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이다.     

 보통 비각 안에는 표석 1개가 설치되지만, 건원릉 비각에는 신도비(神道碑)와 표석 각 1개가 있고, 헌릉 비각에는 신도비 2개가 있다. 신도비는 능 주인의 생애와 업적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세우는데, 중국 진송 때 비롯되어 통일신라시대에 시작되었다. 현재 조선왕릉 내에 있는 신도비는 태조 건원릉 신도비와 태종 헌릉 신도비뿐이다. 이후 세종의 구 영릉 신도비까지 세웠다가, 단종 때 문종의 현릉을 조성할 때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이는 왕의 생애와 업적 등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현종 말년에 표석을 세울 필요성이 논의되어 1682년(숙종 8)에 조선왕릉 중 처음으로 효종의 영릉에 표석을 세웠다.    

       

수라간(水喇間)과 수복방(守僕房)

 수라간은 제향이 있을 때 간단히 음식을 데우거나 조리를 하는 곳이고,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능지기가 임시로 머무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수라간은 정자각 서남쪽에, 수복방은 정자각 동남 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통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건축하였다. 수라간과 수복방은 18세기 중반까지는 2칸 규모로 조성되었으나 이후부터는 3칸 규모로 조성되었다.     


홍살문(紅箭門)

 홍살문은 능역의 가장 아래쪽 정자각 남측 향로와 어로가 시작되는 곳에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놓은 문이다. 동구릉의 경우와 같이 여러 왕릉이 군집되어 있는 경우 능의 초입에 외홍살문이 있으며 각 능마다 내홍살문이 따로 있다. 이 경우, 외홍살문이 내홍살문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홍살 사이의 간격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정자각의 규모가 커지면서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시각적인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다. 붉은 창살이라는 이름처럼 홍살문은 좌우 기둥과 인방, 살 등을 온통 붉은색으로 칠한다. 이 문을 들어서면 신성한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재실(齋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담당하던 참봉(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사에 쓸 향을 보관하고 제기(祭器)를 간수하며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제례를 위한 의식을 준비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제례가 시작되는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재실의 가장 중심 건물은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이며 그 옆에 제관이 머무는 재실이 있고 제수 장만 등을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등이 있다. 각각의 건물은 별도의 행랑이나 울타리로 둘러싸여 공간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재실은 원칙적으로 봉분이나 정자각이 있는 능 중심부에서 2, 3백 미터 이상 떨어진 동남쪽에 놓인다. 제사가 있을 때 왕이나 제관은 일단 재실에 들어가 잠시 머물면서 옷을 갈아입고 제사에 나서게 된다. 건물의 구조는 팔작지붕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단청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건물의 칸수는 능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4. 조선왕릉의 석물     

 왕릉에 석물을 세워놓는 제도는 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되어 고려시대로 이어졌으며, 14세기 말엽에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왕비 노국공주의 정릉(正陵)에서 능침구조와 석물의 종류, 배치가 규범화되었다.      


 그리고 공민왕릉에서 형성된 석물의 배치와 구성의 규범은 조선왕조를 건립한 태조의 건원릉으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석물 배치는 제4대 세종대에 작성된 규범인 세종실록 「오례의」, 그리고 성종 5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제작되었으며, 조선 왕릉 고유의 석물 구성 및 배치, 조형적 특징의 기본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1592년) 이후에는 장명등과 망주석에 꽃무늬가 조각되었고 동물형 세호가 나타나는 등 조선왕릉만의 독특한 형태가 등장하였다. 또한 영조 대에 『국조상례보편』이 편찬과 함께 능제 형태가 많이 줄어들어 병풍석을 완전히 폐지하고 석물의 크기도 작아지는 등 전체적으로 간소화되었다.     


병풍석 (屛風石병석(屛石), 사대석(莎臺石))

 여러 가지 석재로 이루어진 병풍석은 다른 나라의 왕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병풍석의 구조는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의 기록을 보면 지대석(地臺石), 면석(面石), 우석(隅石), 만석(滿石), 인석(引石)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병풍석은 봉분의 흙이 흘러내는 것을 실질적으로 방지하는 기능을 하고, 상징적으로는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병풍석 표현은 고려 공민왕릉 병풍석의 형식을 계승하여 건원릉(健元陵)과 헌릉(獻陵)의 병풍석 면석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구름무늬를 새기고, 면석 옆의 우석은 불교의 영저(靈杵, 금강저)와 영탁(靈鐸, 방울)을 새겼다. 영저와 영탁은 불교에서 수호적 성경을 지닌 불구(佛具)이며 십이지신과 마찬가지로 능을 정신적으로 수호하는 상징적인 도상이다.      


 이후 『국조오례의』의 편찬으로 우석의 영저와 영탁 무늬는 구름무늬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장릉(長陵, 인조)을 시작으로 면석의 십이지신상이 없어지고 모란무늬로 바뀌었다. 이는 장릉이 뱀의 피해가 있어 능을 옮겼기 때문에 원래 능에 있던 십이지신상의 뱀 조각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설이 있다. 모란은 화려하면서도 전통적으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에 병풍석의 장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모란은 융릉(隆陵), 홍릉(洪陵), 유릉(裕陵) 병풍석에서 나타난다. 또한 우석도 기존의 구름무늬에서 연꽃과 난초 무늬로 바뀌었다. 따라서 불교의 요소가 왕릉 석물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 초기에 해당되며, 시대가 바뀔수록 점차 조선만의 독특한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     


난간석(欄干石)

 난간석은 병풍석 밖으로 봉분을 울타리처럼 두르거나 병풍석 없이 봉분을 두르고 있는 석물로, 왕릉의 봉분 주변에 난간석을 조성한 것은 우리나라 능제의 특징이다. 이미 통일신라의 성덕왕릉(736년)에서 그 초기 예를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중국의 능에서는 보이지 않는 석물로, 건축물에 난간을 만들었던 방식을 왕릉에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세조 광릉 이후 병풍석이 조성되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병풍석의 유무와 상관없이 거의 모든 왕릉에는 난간석이 조성되어 물리적으로나 시각적으로 봉분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혼유석(魂遊石)과 고석(鼓石)

 능의 정면에 상의 형태로 놓인 혼유석의 원래 명칭은 석상(石床)이다. 재궁(왕의 관)을 넣은 후 그 통로를 막고 그 위에 박석과 북 모양의 둥근 고석을 놓고, 그 위에 혼유석을 설치한다. 


 혼유석이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속칭(俗稱)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혼이 앉아서 쉬는 의미로 해석된다. 혼유석의 기원은 신라에서 찾을 수 있는데, 태종무열왕릉의 봉분 앞에 공양물을 얹을 수 있는 석상의 잔재가 있으며, 그 외의 통일신라 왕릉에는 대부분 석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석물은 중국의 능에서는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구존물로 후에 혼유석의 개념으로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둥근 북 모양의 고석은 ‘족석(足石)’, '부석(跗石)'으로 불리기도 한다. 건원릉(태조)과 헌릉(태종과 원경왕후)은 5개를 배치하였고, 영릉(세종과 소헌왕후)부터 4개를 배치하였다. 그러다가 휘릉(徽陵, 장렬왕후)에서 5개를 배치하였는데 이는 건원릉의 예를 잠시 따른 것이고, 그 이후에는 다시 4개를 설치하였다. 고석의 높이는 평균적으로 50cm 정도인데 둥근 형태의 사면에는 기괴한 얼굴 모양이 새겨져 있다.


 『국조오례의』에는 나어두(羅魚頭)를 새긴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어두귀면(魚頭鬼面), 즉 “물고기 머리에 귀신 얼굴”이라는 사전적 의미로, 흉측하게 생긴 얼굴을 조각하여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귀면은 입에 고리를 물고 있어 무서운 표정이 아니라 웃고 있는 인상을 준다.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봉분 주변에는 동물 조각이 둘러져 있는데, 정면을 제외한 삼면에 석호와 석양이 2쌍씩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능에 동물상을 배치하는 관습은 통일신라시대 성덕왕릉의 네 귀퉁이에 사자를 배치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능의 주변에 석호와 석양을 배열하는 관습은 이미 중국에도 있었으며 후한 시대에 석인, 석주와 함께 양, 호랑이, 낙타, 말을 능 앞에 배치했다.      


 그러나 조선왕릉 동물상의 위치로 보아, 조선왕릉의 석호와 석양은 능의 뒤편 봉분 주변에 놓여 있지만, 중국의 동물상들은 능의 입구, 즉 신도 양옆에 인물상과 함께 놓여 있어, 그 배치와 역할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실제 궁전이나 관아의 문 앞에 경비를 세웠던 모양을 모방한 형상이고, 석수가 놓인 방향도 신도를 향하여 일렬로 도열하는 형식이다.     


 이에 비해, 조선의 석수들은 능 쪽이 아닌 외부를 향해 있다. 즉 곡장 방향으로 머리를 대고 있고 봉분 쪽에서는 엉덩이만 보이도록 배치하였다. 이것은 외부 침입에 대한 경계에 전념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권력의 과시보다는 능을 수호하고 음양의 균형을 잡기 위한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석수의 자세에서 석양은 항상 서 있는 자세로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봉분 주위에 배치되어 있으며, 석호는 두 앞발을 세우고 앉아서 능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석양과 석호를 번갈아 배치하였는데, 이는 양의 온순함을, 호랑이의 사나움을 강조하며 균형 있게 배치한 것이며, 또한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듯 조선왕릉의 석물은 중국처럼 권위의 상징이기보다는 벽사(辟邪)의 의미가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격적인 모습이 아니라 편안히 앉아 있고, 얼굴 역시 무서운 표정이 아니라 친근하고 온순한 표정을 하고 있다.     


망주석(望柱石)과 세호(細虎)

 혼유석 좌우에 촛대처럼 서 있는 한 쌍의 망주석은 석망주, 망두석(望頭石), 촛대석, 화표석(華表石), 전죽석(錢竹石)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망주석의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중국에서는 묘역이나 신도의 입구를 표시하거나 석물의 시작점을 알리는 표식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왕릉에서 망주석의 기능은 중국과는 다르게, 혼이 자기의 유택(幽宅)을 찾을 때 이용한다고 하고, 또한 다산을 상징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명칭상으로 볼 때도, 바라볼 망(望), 기둥 주(柱)가 의미하듯이 묘가 있는 곳을 멀리서 바라보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으로 왕의 혼이 밖에서 노닐다가 본인의 능을 찾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망주석 가운데에는 상징적인 무늬를 새기는데, 『국조오례의』에는 ‘귀를 만들어 구멍을 판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국조상례보편』에는 ‘세호를 새긴다, 왼쪽 기둥에는 올라가는 모양을, 오른쪽 기둥에는 내려오는 모양을 새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호는 중국의 망주석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세호의 한자의 뜻풀이대로 하면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뜻이나, 실제는 호랑이 모습과 닮지는 않았다. 세호의 역할과 새긴 목적이 기록에 없어 상징성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장식화되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구멍이 막혀 있으며 꼬리가 긴 동물이 조각되었다. 대체로 좌승우강(左陞右降)의 형태로 조각되었으나 일부 왕릉은 반대로 조각되는 경우도 있다.   

  

장명등(長明燈)

 장명등은 등불을 밝히기 위한 석등으로 조선왕릉에서만 등장하는 석물이다. 『국조오례의』에 있는 장명등에 관한 기록을 보면 ‘4방의 옆을 통해 파서 연기(烟氣)를 흩어지게 한다’라고 그 구조를 설명하고 있어, 초기에는 실제로 묘역을 밝히는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명등에서는 불을 피운 흔적이 없어 상징적인 조형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장명등은 초기에는 고려시대 왕릉과 같이 화사석의 평면이 사각형이었으나 이후에 팔각형, 사각형, 팔각형의 형태로 변화되고 또다시 반복된다.     


문석인(文石人)

 머리에 쓰는 복두(幞頭), 포(袍)로 불리는 옷, 허리띠인 대(帶), 손에 드는 홀(笏), 가죽신인 화(靴)를 갖춘 공복을 착용한 백관의 모습이다. 조선왕릉 문석인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같지만 키, 얼굴의 크기와 표정, 선의 부드러운 정도, 옷 주름의 표현, 모서리의 곡선화 정도, 모자의 형태 등에서 변화가 나타난다.      

    

무석인(武石人)

 능침의 하계에는 무석인 한 쌍이 석마를 대동한 채 서있다. 무관의 성격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문석인에 비해 다소 커진 얼굴과 바른 목, 굵어진 듯한 몸 처리와 약간 길어진 상반신의 처리, 그리고 중요한 골격 마디의 강조 등으로 무관의 특징을 표현하였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칼을 잡고 서 있는 무석인의 형식은 전 시기에 걸쳐서 뚜렷한 구분을 찾기가 쉽지 않으나, 크게 보면 문석인에서 보이는 변화와 비슷한 변화양상을 보인다.     


석마(石馬)

 석마는 명나라에서는 다른 석수와 같이 신도에 배치하여 왕의 위엄을 의미하지만, 조선왕릉에서는 신하의 소유로 문무석인의 뒤에 약간 남쪽으로 한 필씩 서 있다. 말의 자세는 등의 선이 거의 수평으로 움직임이 전혀 없으며, 고삐는 없이 석인상 뒤에서 고개를 숙여 대기하는 자세이다.     


 문무석인에 비해 말의 크기가 너무 작고 안장이 없으며 꼬리도 길게 땅에 끌리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석마는 물리적인 운송보다는 상징적인 운송을 염두에 둔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태조 건원릉의 석마는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가 뚫렸으며,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 형상이다. 그러나 이후 대부분 석마의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는 막혀 있으며, 막힌 면에는 난초 같은 식물이 조각되어 있다. 다리 사이를 막았던 이유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뚫린 경우(건원릉, 헌릉, 장릉 등)도 종종 있는 것을 볼 때 견고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5. 조선왕릉의 훼손     

 조선왕릉은 이처럼 만들 때도 관리할 때도 국가의 모든 인력이 동원되어 만들어지고, 지켜져 왔지만 훼손된 사례들도 있다. 정치적인 문제로 왕릉이 원이나 묘로 격하되는 경우도 있고,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된 사례가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급격한 현대화를 겪으면서 주변의 숲들이 파헤쳐지고, 능역 안까지 침범당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조선왕릉의 역사적, 자연적 가치가 훼손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로는 조선왕릉에 부합되지 않는 주변 시설들을 철거하고, 파괴된 능역을 기본 능제로 복구하는 등 세계문화유산으로써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조선왕릉을 복원해나가고 있다.     


태종 이방원에 의한 정릉 훼손 사례

 이방원은 대군 시절 당시, 계모 신덕왕후가 이방원 자신을 제치고 본인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내세운 것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 1405년 신덕왕후의 정릉이 도성 안에 있고, 능역이 광대하다는 논란을 내세워 100보(180m) 밖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 뒤 권세가들이 정릉 주변의 땅을 차지했는데, 하륜은 사위들까지 동원했다. 왕위에서 물러난 태상왕(태조)은 정릉 주변에 권세가들의 집이 들어서자 남몰래 울었다고도 한다. 태조가 승하한 뒤에는 태종은 신덕왕후 강 씨를 왕후에서 첩으로 격하시켰다. 이에 따라 정릉도 능에서 묘로 강등되어 도성 밖 양주(현 성북구)로 이장되었으며, 석물들은 청계천 광통교 공사에 쓰게 하였다. 그 뒤 현종 때 송시열의 청으로 신덕왕후는 다시 왕후로 추존되었고, 이에 따라 정릉도 다시 조성되어 석물들이 설치되었는데, 이러한 까닭으로 정릉에는 조선 초기의 사각 장명등과 조선 후기의 석물들이 공존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한 훼손 사례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선정릉의 봉분들을 파헤치고, 정자각과 재궁을 불태웠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릉과 정릉의 세 개의 재궁이 모두 잿더미로 변해 있었으며, 처음에는 왕의 시신이 옮겨졌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으나, 얼마 뒤 선릉 재궁의 잿더미에서 불에 탄 뼈가 발견하였고, 근처에서도 시체도 발견되면서 왕의 시신이 불타버린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였다.     

 

 이때 재궁이 불탄 것 이외에도 정자각이 불타거나 석물이 갈라지고, 봉분의 사초 등이 크게 훼손되는 등 선조의 직계 조상인 성종과 중종이 묻힌 선정릉은 왜군에 의해 불태워지는 수난을 당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종묘사직이 파괴된 일과 더불어 일본에 대한 척화론의 주요 근거가 되었으며, 정유재란 이후 일본이 화친을 청할 때, 조정에서는 선정릉을 파헤친 범인들을 조선으로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본 측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서울에는 간 적도 없었던 대마도의 죄인들을 협박하여 반강제적으로 데려왔고,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 조정은 심문 과정에서 낙형을 가하는 등 여러 고문들을 가했으나, 두 대마도인들은 일본 측의 협박과 회유를 통해 압송되었다는 점을 얘기하면서 자신들의 무고함을 호소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이들의 진위논란이 벌어졌으나, 두 죄인들을 목 베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임진왜란 이후 선정릉의 능실에는 불타버린 성종과 중종의 시신 대신 불타버린 재궁의 재와 부장품을 넣었다고 한다.    

 

난개발로 인한 훼손 사례

 급격한 현대화를 통한 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왕릉 주변의 숲들이 사유화되었고, 각종 시설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를 법적으로 금지하여도 불법으로 들어서거나 해당 기관, 사람들의 보상 문제로 많은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서오릉은 100여 곳의 식당들이 불법 가건물이나 비닐하우스로 위장하는 등 불법적으로 난립하여, 구청에서 단속에 나서기도 하였다. 또한, 주변의 목장 시설에 관해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던 적이 있었다. 한국 최대의 왕릉군인 동구릉 옆에는 골프장이 들어서 경관에 훼손이 되었고 한때 보상 문제로 많은 갈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김포시와 영월군의 장릉 근처에 군부대시설이 들어서 문제가 되었고, 홍유릉의 바로 앞에는 왕릉의 경관과는 맞지 않는 형식의 대형 결혼식장이 들어서고 하천이 복개되어 금천교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정조의 왕릉이 있는 융건릉도 경기 화성 태안지구 개발사업과 관련하여 훼손 논란이 있었다.                                                                                                                        

6. 조선왕릉 알아보기 헌인릉(獻仁陵)』 서울 서초구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군(群)으로, 조선 제3대 왕 태종과 태종비 원경왕후가 함께 잠든 헌릉(獻陵)과 조선 제23대 왕 순조와 순조비 순원왕후가 함께 잠든 인릉(仁陵)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현재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인 문화재이다. 조선왕릉은 대부분 능침 보존을 위해 능역 앞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 놓았고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이 가능하지만, 태종의 헌릉은 능침 옆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따로 마련이 되어 있어서 능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능이다. 경기도 여주의 세종의 영릉(英陵) 역시 그러하다.     


 헌인릉 역시 매표소에서부터 시작되는 관람동선에 따라 인릉과 헌릉 순으로 답사해 보도록 하자.


7.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인릉(仁陵)』      


 순조는 조선의 제23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시기로 넘어와서는 순조숙황제로 추존된 황제이다. 


정조의 차남으로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해 11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바람에 조선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첫 번째 어린 나이로 즉위한 왕은 바로 다음 왕인 순조의 손자 헌종(8세)이다.      


 또한 순조는 상왕(태종)이 있었던 세종을 제외하면 가장 짧은 세자 시절을 보낸 임금이기도 하다. 세자 책봉조차도 정조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는데, 1800년 2월 세자로 책봉되고 6월에 아버지인 정조가 승하하자마자 왕위에 올랐으니, 4달의 세자 시절을 보낸 것이다.      


 순조보다 세자 생활이 짧았던 왕으로 세종(2달)이 있으나,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스스로 의도적으로 왕위를 넘기고 상왕이 된 후에도 군권을 행사하며 외척들을 견제하는 등 막강한 뒷배가 되어줌으로써 아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에 순조와는 상황이 다르다.     


 즉위 당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 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조의 탕평책에 의해 위축되어 있던 노론 벽파 세력들은 이 기회에 정조의 측근들을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를 명분으로 삼았다. 천주교 탄압은 노론 벽파가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몰아내는 수단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다.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고 있던 중에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는데, 이 사건은 정순왕후의 벽파 세력이 천주교 믿는 시파 세력을 숙청하는 사건으로 정약용의 형 정약종은 처형되고 정약용과 그 형 정약전은 유배를 보낸다. 이 신유박해 때 강화도에서 살던 철종의 할아버지이자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도 처형된다. 그리고 그전에 은언군의 부인과 적자 며느리 역시 천주교 신부(주문모)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당시 천주교에 대한 정순왕후의 기록은 순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선왕(先王)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치성(熾盛)해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邪學)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와 수령은 자세히 효유(效惟)하여 사학(邪學)을 하는 자들로 하여금 번연히 깨우쳐 마음을 돌이켜 개혁하게 하고, 사학(邪學)을 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징계하여 우리 선왕(先王)께서 위육(位育)하시는 풍성한 공렬(恭列)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개전(改展)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 종사(從事)할 것이다.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邪學)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劓罰)을 시행하여 진멸(鎭滅)함으로써 유종(遺種)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이 하교(下敎)를 가지고 묘당(廟堂)에서는 거듭 밝혀서 경외(京外)에 지위(知委)하도록 하라."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그러나 정순왕후는 순조의 장인인 안동 김 씨 세도가인 김조순에 의해 실각이 되고, 노론 벽파 세력 역시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김조순의 노론 시파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홍경래의 난 이후 국정의 대부분을 세도 가문들이 마음대로 운영하는 이른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이후 조선 정치는 소수 가문 간의 암투와 비리가 난무하는 혼란의 시기를 맞이한다.


 아들인 효명세자는 매우 영특해 똑 부러진 일 처리로 무너져 가던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으며 신하들과 순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불과 2년 좀 넘어서 병에 걸려 일찍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조의 두 딸도 사망했다.        

 

 이로 인한 충격 탓인지 다리에 난 종기가 악화되어 순조 역시 얼마 후 경복궁 회상 전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 때문에 왕위는 순조의 장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인 8살 헌종이 이어받게 되었다. 이때 재야에 있던 정약용을 불러서 치료를 하려 했으나 정약용이 미처 오기도 전에 사망했다.      


 순원왕후 김 씨는 안동 김 씨 김조순과 청양부부인 심 씨의 딸로 정조 13년(1789)에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순조 2년(180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 씨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면서, 순원왕후의 집안이었던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세도의 틀을 마련하였으나 조정과 사회는 불안정하였다.      

 순조 34년(1834) 손자 헌종이 8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였고, 인척인 김조근의 딸을 왕비(효현성황후)로 간택시켰다. 이후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장조(사도세자)의 손자인 전계대원군의 아들 원범을 양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철종이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인척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장황후)로 간택시켜 세도정권의 절정기를 맞게 하였다. 조선의 왕비 중 최초로 2대를 걸쳐 수렴청정을 한 순원왕후는 철종 8년(1857) 창덕궁 양심합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광무 3년(1899년)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순원숙황후로 추존되었다.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와 순원왕후 김 씨의 능으로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이다. 우왕좌비(右王左妃)의 형식에 따라 정자각에서 봤을 때 왼쪽에 순조, 오른쪽에 순원왕후를 모셨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는데, 한 기는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표석(조선국 순조대왕 인릉 순원왕후 부좌)이고, 1기는 대한제국시대에 세운 황제국 표석(대한 순조숙황제 인릉 순원숙황후 부좌)이다.     


 능침에는 『국조상례보편』의 제도를 따라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다. 인릉은 원래 파주에 있었다가 철종 7년(1856)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는데, 천장 후에 편찬한 『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에는 능침 석물을 다시 사용한 기록이 있다.      


 다시 사용한 석물은 예종 1년(1469) 세종의 영릉(英陵)을 천장하고 묻은 구 영릉(英陵) 석물과 중종 32년(1537)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을 천장하고 묻은 구 희릉(禧陵) 석물이다. 따라서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 대부분의 석물은 구 영릉과 구 희릉의 석물을 다시 사용하였고, 일부 석양과 망주석, 석마는 새로 제작하였다. 이는 왕릉 천장으로 드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순조는 상왕(태종)이 있었던 세종을 제외하면 가장 짧은 세자 시절을 보낸 임금이기도 하다.


8.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능헌릉(獻陵)』 

     

 조선의 3대 왕인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 씨의 다섯째 아들로 공민왕 16년(1367)에 함흥에서 태어났다. 우왕 9년(1383)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 대언(승지)이 되었는데,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왕자로서 정안군에 책봉되었다. 태종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 씨와 정도전 등과 대립하여 왕세자 책봉에서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신덕왕후 소생인 방석이 왕세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더불어 정도전이 재상 중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태종은 태조 7년(1398)에 정변을 일으키는데 이 사건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이다.      


 태종은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제거하고, 왕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도 살해한다. 이 사건을 통해 태조는 둘째 아들인 영안군 방과를 왕세자로 책봉하는 교지를 내렸고,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나자 왕세자 방과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정종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신의왕후의 소생 사이에 또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태종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가 태종의 넷째 형인 회안군 방간으로 하여금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겼고 회안군과 태종은 개경 시가지에서 무력 충돌을 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제2차 왕자의 난(박포의 난)’이다.      


 제2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승리하자, 박포는 사형, 회안군은 유배됨으로써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지위가 더욱 확고해진 태종은 그해 2월 왕세자로 책봉되고, 11월에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창덕궁을 지었으며, 태종 5년(1405)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를 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사병을 혁파하여 군사권을 장악하였으며,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외척 세력을 견제하는 등 강력한 왕권 강화를 이룩하여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태종 18년(1418) 장자인 양녕대군을 왕세자에서 폐위한 후,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을 왕세자로 삼았으며, 2개월 뒤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군권을 잡고 여생을 보냈다. 그 후 세종 4년(1422) 창경궁에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경왕후 민 씨는 고려 우왕 8년(1382)에 태종과 혼인하고, 조선 개국 후 정녕옹주(靖寧翁主)에 책봉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정도전 등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득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원경왕후의 도움이 컸다. 난이 일어나기 열흘 전,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였다. 이때 사병을 거느린 왕자들은 병사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무기와 군사 장비까지 모두 내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얼마간의 사병과 무기를 친정집에 숨겨두었다.      


 1398년 음력 8월 26일, 당시 태조의 병환이 깊어 왕자들은 근정전 문밖 서쪽 행랑에 모여 숙직을 하고 있었다. 원경왕후는 집사를 보내 자신이 갑자기 복통이 심하다는 핑계를 들어 태종을 불러내었다. 그 후 태종은 집에 와서 갑옷을 입고 난을 준비하였고, 원경왕후는 친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숨겨둔 사병과 무기를 풀어 태종에게 내주었다. 이로 인해 제1차 왕자의 난은 성공하였고, 태종은 왕위 계승을 위한 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후 원경왕후는 정종 2년(1400)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태종이 즉위하자 왕비(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태종 즉위 후 태종과의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은 권력의 분산과 왕권 강화를 위하여 친족 배척의 정책을 쓰는 한편 후궁을 늘려나갔는데, 원경왕후는 이에 크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특히 태종은 외척 세력 견제를 위하여 원경왕후의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제거하면서 원경왕후와의 불화가 극심해졌다.  

    

 태종 18년(1418) 태종이 태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후덕왕대비가 되었으며, 세종 2년(1420) 수강궁 별전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부부관계가 악화된 상태에서 맞이한 국상에서 효자 세종은 성의를 다하여 어머니 상을 모시는데 삼베로 된 상복을 입고 식음을 전폐한 채 슬퍼하고 있으니, 태종은 임금인 아들을 생각하여 하루를 한 달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를 적용하여 1년 12개월이 아닌 12일만 상복을 입도록 하였으나, 효자인 세종은 1년을 꼬박 상복을 입었다.      


 먼저 떠난 부인의 묫자리를 잡아야 하는 태종은 결국 훗날 자신의 묫자리까지 잡아야 하기에 한강 남쪽 대모산 자락을 정한 뒤 왕릉의 오른쪽(자신의 자리)을 비워두는 우허제(右虛制)를 쓰도록 하였다. 아버지 이성계를 건원릉에 모신 상태에서 자신은 당시만 해도 건너기 힘든 한강 남쪽으로 자리를 잡은 것인데, 이것은 끝내 자신을 세자로 앉히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원경왕후 국상을 치른 2년 후 태종 이방원도 승하하여 생전에 비워둔 왕비 오른쪽 빈자리에 쌍릉으로 조성하니 형님인 정종의 능과 닮은꼴이라고 한다.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만 두 명의 부인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하고 혼자였지만 그 아들들은 부부 쌍릉에 묻히게 된 것이다.  

   

 헌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능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전체적으로 넓은 능역과 확 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조선 전기의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능침은 모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으며, 문무석인은 각 2쌍씩, 석마, 석양, 석호는 각각 4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조선왕릉 중에서도 다른 능보다 2배로 석물이 많아 완벽한 쌍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 밖에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은 5개로 조선 전기의 상설제도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향로, 정자각, 신도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각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하나는 세종 4년(1422)에 세운 신도비(보물)이고, 또 하나는 숙종 21년(1695)에 임진왜란으로 손상된 신도비 옆에 새로 세운 신도비이다. 정자각 북서 측에는 소전대가 있는데, 이는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조선 전기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신덕왕후의 정릉, 그리고 태종의 헌릉 세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다.     


 장례를 검소하게 치루라는 태종의 평소 당부 때문인지 헌릉은 향로와 어로가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 정자각에 오르는 동계(계단)가 생각보다 검소하고 소박하게 되어 있다. 

아버지를 건원릉에 모신 상태에서 자신은 당시만 해도 건너기 힘든 한강 남쪽으로 자리를 잡은 것인데, 이것은 끝내 자신을 세자로 앉히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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